항목 ID | GC058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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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應哲 |
이칭/별칭 | 백언(伯言),우재(愚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의병.
[개설]
진안 이산묘에 배향된 것은 후손들이 진안 지방에 세거하며, 이산묘 창건 당시부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가계]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백언(伯言), 호는 우재(愚齋).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서 규암(葵庵) 전계종(全繼宗)의 손자이다.
[활동 사항]
전응철(全應哲)[?~?]은 『대한 이산묘지(大韓駬山廟誌)』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자질이 탁월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서울을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여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응철은 당시 옥과 현감(玉果縣監)인 이흥발(李興渤), 대동 찰방(大同察訪)인 이기발(李起渤), 순창 현감(淳昌縣監) 최온(崔縕), 전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察訪) 유즙(柳楫) 등의 다섯 사람이 함께 내놓은 격문(檄文)을 보고 분발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의병에 참가하였다.
사촌 동생인 전응종(全應鍾)과 전의사(全義士) 정동협(鄭東俠), 신성식(辛成式)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각지의 의병과 가동 수백 명을 이끌고 여산(礪山)의 의병 집결지[募義所]로 떠났다. 전응철은 의병군 수뇌부와 함께 군략[軍務]을 모의하였다. 의병과 함께 경기도 과천(果川)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미 조선과 청나라가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천거되었고, 자세한 사적은 『창의록(倡義錄)』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