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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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以衷 |
이칭/별칭 | 계지(繼之),원지(元之),사지당(仕止堂),아림부원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오경택 |
[정의]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계지(繼之)·원지(元之), 호는 사지당(仕止堂). 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愼修)의 후손으로 증 호조 판서(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의 아들이고 설회(薛懷)의 사위이다. 아들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후경(愼後庚)이다.
[활동 사항]
신이충(愼以衷)[?~?]은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문장에 능하였으며, 1377년(우왕 3) 연방시(蓮榜試)에 급제하였다. 당시 집권자인 신돈(辛旽)의 전횡(專橫)을 비판하면서 태학의 여러 생도와 연맹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1397년(태조 6) 황해도 감찰(黃海道 監察)을 지냈으며, 1410년(태종 10)에는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아버지 상중에 종과 양민을 때려죽인 일과 아전을 때려죽인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고의로 한일이 아니라는 점이 참작되어 용서를 받았다. 한편 1420년(세종 2) 판이천현사(判利川縣事)로 재직하면서 양녕 대군의 비위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후 세종 대 경상도 도사와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481년(성종 12) 아림부원군(娥林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양렬(襄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47년에는 진안 이산묘 영모사가 건립되면서 유림 40위 중 한명으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