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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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成壽 |
이칭/별칭 | 성오(聖五),만오재(晩悟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경택 |
출생 시기/일시 | 1805년 - 오성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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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70년 - 오성수 사망 |
출생지 | 오성수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
묘소|단소 | 오성수 묘소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 신전촌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양(咸陽) |
[정의]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오(聖五), 호는 만오재(晩悟齋). 고조할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讓衛) 부호군(副護軍) 오익령(吳益齡)이고 아버지는 오부원(吳富源)이다. 효자로 동몽교관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진 오성복(吳成福)이 형이다. 아들로는 오석한(吳錫漢), 오제한(吳濟漢)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오성수(吳成壽)[1805~1870]는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함을 수신의 요체로 삼고 글을 읽음으로써 경사(經史)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으로 산림을 자처하며 금산(錦山)에서 학문적 명성을 얻고 있던 금곡(錦谷) 송래희(宋來熙)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후 경독(經讀)에 힘쓰는 한편 자질(子姪)을 가르칠 때에는 의방(義方)을, 종족을 대할 때에는 돈목(敦睦)을 우선으로 하였다. 이조 참판을 역임한 나주 임희진(林喜鎭)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묘소]
묘는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 신전촌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예조 판서 유하(游霞)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승정원 좌승지 완운(浣雲) 서광필(徐光弼)이 글씨를 쓴 묘갈명(吳公成壽墓碣銘)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