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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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遠奎永世不忘碑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 1441-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유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892년 8월 - 유원규 영세 불망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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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유원규 영세 불망비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 1441-1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유원규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67㎝[높이]|37㎝[너비]|12㎝[두께]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있는 개항기의 비석.
[개설]
1892년(고종 29)에 진안 현감(鎭安縣監) 유원규(柳遠奎)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고을 백성들이 세운 비석이다.
[건립 경위]
유원규(柳遠奎)는 1892년(고종 29) 4월에 진안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11월 보성 군수로 전임하였다. 유원규가 고을을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영세 불망비를 세웠다. 『고종실록』에는 유원규에 관한 기록이 단 1건 전하고 있다. 1894년 9월 17일 의정부에서 올린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전 보성 군수(寶城郡守) 유원규(柳遠奎)는 성실한 마음으로 정사를 하면서 자기 녹봉(祿俸)을 덜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비적(匪賊)들을 막아 온 경내가 편안해졌다. 그가 관직이 바뀌어 떠난 뒤 고을 백성들이 모두 유임시켜 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위치]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 시동 마을 살골에서 신기 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에 있다. 이익응 영세 불망비가 있는 시동 마을은 연창 교차로에서 ‘남원, 마령’ 방면으로 우측 방향인 관진로를 따라 4㎞ 이동하다가 월운 터널 진입 후 관진로를 따라 5㎞ 이동하다보면 외궁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남원, 관촌’ 방면으로 좌회전해 관진로를 따라 3㎞ 직진해 좌산 삼거리에서 백운 방면으로 좌회전하고 성백로를 따라 3㎞ 이동하면 된다. 고덕교 부근에서 우회전하면 바로 옆이 살골인데 이곳 모퉁이 기슭에 있다.
살골에는 살골 비석군이라하여 유원규 영세 불망비, 이익응 영세 불망비, 이중익 영세 불망비, 박영서 시혜 불망비가 있다.
[형태]
귀부와 이수가 없이 비신만 세워져 있다. 2008년에 이르러 영세불망비 바로 앞에 유원규의 후손과 고을 사람들이 오석으로 된 한글 안내석을 세워 놓았는데, 원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풀이하여 전면에 새겨 놓았다. 높이 167㎝, 너비 37㎝, 두께 12㎝ 이다.
[금석문]
비표(碑表)에는 ‘현감 유후원규 영세 불망비(縣監柳侯遠奎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글자의 좌우에 ‘민지망의 청백위경 연멸지호 견호지부(民之望矣 淸白爲慶 捐滅之戶 蠲護之賦)’라 새겨져 있다. 백성들은 관리의 청백함을 커다란 경사로 여기고 바라고 있는데, 현감 유원규가 호구세를 부담하는 호수를 줄여주고 조세를 줄여주었다는 내용이다. 한편 뒷면에는 ‘광서 십팔년 임진 팔월 기유립(光緖十八年壬辰八月 己酉立)’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원래의 비석 앞에 한글로 된 안내석을 앞에 세우고 그 둘레에 철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2013년 8월 현재 사방이 가시덩굴로 덮여 있어서 비석의 존재를 쉽게 확인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다.
[의의와 평가]
영세 불망비는 흔히 송덕비 또는 선정비라고도 일컬으며, 지방 곳곳에서 수령의 선정을 칭송하여 그곳 백성들이 세웠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의 독특한 지방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유원규 영세 불망비에는 진안 현감 유원규가 특히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줄여주었다는 점이 새겨져 있어서 이 비석의 건립이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에 토대를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