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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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原梁氏二孝一烈碑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유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892년 - 남원 양씨 이효일렬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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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남원 양씨 이효일렬비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양원하|양종윤|양명수 처 의성 정씨 |
크기(높이,너비,두께) | 110㎝[높이]|48㎝[너비]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에 있는 남원 양씨 가문의 효열 정려비.
[개설]
1892년(고종 29)에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에 살았던 남원 양씨의 효자 양원하(梁源河)와 증손 양종윤(梁鍾潤), 그리고 양종윤의 아들 양명수(梁命洙)의 처 의성 정씨(義城丁氏)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여 세운 정려비이다.
[건립 경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에 살았던 양원하와 증손 양종윤, 그 아들 양명수의 처 의성 정씨는 모두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고, 시부모와 남편에 대한 공경과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를 높이 평가한 이 고을 진사 정해문(鄭海文) 등이 상언(上言)하고 좌부승지 송병학(宋秉學)이 계사(啓辭)를 올려 정려(旌閭)를 받기에 이르렀다.
[위치]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송림 마을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남원 양씨 이효일렬비가 있는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는 은천 삼거리에서 송림, 백운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평가로를 따라 3㎞ 가다 보면 나온다.
[형태]
석정비로 높이 110㎝, 너비 48㎝의 큰 석판에 양원하(梁源河), 양종윤(梁鍾潤), 양명수(梁命洙)의 처 의성 정씨(義城丁氏) 등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석정비 바로 옆에는 3인의 기적비(紀蹟碑)와 합동 비 등 4개의 비가 따로 세워져 있다.
[금석문]
비표(碑表)에는 ‘효자 학생 양원하지려(孝子學生梁源河之閭)’라 새겨져 있다. 석조 정려의 비표에는 우측으로부터 ‘효자 학생 양원하지려(’孝子學生梁源河之閭), ‘효자 학생 양종윤지려(孝子學生梁鍾潤之閭)’, ‘열녀 양명수 처 의성 정씨지려(烈女梁命洙妻義城丁氏之閭)’ 등 3인의 비명이 새겨져 있고, 비음에는 각자의 행적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원 양씨(南原梁氏) 이효일렬(二孝一烈) 석정기(石旌記)
효(孝)로써 효를 권하여 효자가 되고, 효를 미루어 충(忠)이 되며 충에서 열(烈)이 되는데 열행(烈行)이란 윤기(倫紀)의 대체(大體)로써 예(禮)의 근본이 되고 효도란 사람의 대륜(大倫)으로써 행실에 근원이 되어 백대(百代)가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희라! 사람은 누구나 이 마음이 없는 이가 없건만 능히 행하는 자는 드물다. 지금 효자인 양공(梁公) 원하(源河)는 남원인(南原人)으로 병부(兵部) 낭중(郎中) 둔암(遯菴) 휘 능양(能讓)의 후예인 성균 좨주(成均祭酒) 휘 준(俊)의 12대손이며 숭록 대부 좌찬성 휘 원근(元瑾)의 운손(雲孫)[8대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어버이를 섬기는 효행으로써 세상에 모범이 된 사람을 다 열거하기는 어려우나 양공은 6년 동안 여묘(廬墓)를 하여 호랑이가 곁에서 호위를 하고 까치가 처마에 둥치를 틀며 묘소 앞무릎이 닿는 자리에 웅덩이가 패여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고, 여묘를 끝낸 뒤에도 아무리 큰 비가 내리고 큰 눈이 쌓여도 성소(省掃)를 폐하지 않아 사람들이 너나 없이 노효자(老孝子)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도 효로써 효를 전하였는데, 그 증손 장보(章甫)[선비라는 뜻] 종윤(鍾潤)에 이르러서는 선대의 효행을 계승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매우 독실하였다. 그 어머니가 여러 해를 병으로 자리에 누워 온갖 약이 다 효과가 없고 오직 총탕(蔥湯)[파를 끓인 국]과 생선구이만을 원하였다. 때는 한 겨울인데 호읍(號泣)하면서 하늘에 비니 눈밭에서 생파가 솟아 나왔고, 얼음이 깔린 냇물에서 물고기가 저절로 뛰어나와 어머니를 공양할 수 있었으며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쏟아 넣어 며칠간의 목숨을 연장하게 하였다. 또 아버지가 지붕에 올라갔다가 실족하여 땅으로 떨어져 장차 구제할 수 없게 되었는데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올리고 밤이면 북두칠성에게 빌어 자신이 대신하게 해달라고 하였더니 뜻밖에 한 의원이 나타나서 진맥을 하고 침을 놓으니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하도 감사하여 성명을 물으니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어찌 하늘이 감동하여 보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천명이 다한 때에 이르러서는 허벅지의 살을 잘라 약에 타서 올려 3일간의 목숨을 연장하였고 상장(喪葬)과 상제(祥祭)를 한결 같이 예제(禮制)에 따랐다.
아들 명수(命洙) 역시 효도로 이름이 있었고, 처 의성 정씨 역시 천성이 지극하여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경대하였는데 부군(夫君)이 중병으로 여러 해를 앓다가 마침내 죽게 되니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쏟아 넣어 2일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애훼(哀毁)하면서 상기(喪期)를 마치기를 한결같이 예절대로 하였으니 옛날의 열녀전(烈女傳)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고 지금의 『삼강록(三綱錄)』에서도 보기 어려운 일인데 어쩌면 양씨 집에서는 효열(孝烈) 세 사람이 한 집안에 모이게 되었단 말인가? 희라! 양씨의 후손들도 다 그와 같이 선대의 효열을 계술한다면 어찌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효자의 6세손 상학(相鶴)도 대대로 효도로 이어받아 계술하는 데에 효성스러운 사람이다. 진사 정해문(鄭海文) 등이 상언(上言)하고 좌부 승지 송병학(宋秉學)이 계사(啓辭)를 올려 정려(旌閭)를 명하니 금상(今上)[고종] 29년 임진 5월 초8일의 일이다. 이 사실은 도유(道儒)의 본장(本狀)과 예조의 입안(立案)에 상세히 실려 있다. 나는 글을 잘못하지만 기(記)에 가름하는 바이다.
성상(聖上) 29년 임진 8월 일에 숭록대부 예조 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의금 부사 전의(全義) 이희로(李僖魯)는 찬하다.“
[현황]
마을 입구에 남원 양씨 이효일렬비를 포함하여 이들 3인의 기적비(紀蹟碑)와 합동 비 등 모두 5개의 비가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남원 양씨 이효일렬비는 유교적 가치를 존숭하였던 조선 말 진안 지역의 사회적 동향과 이곳 남원 양씨 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