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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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川書院廟廷碑 |
이칭/별칭 | 용연사(龍淵祠),삼천사(三川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13-1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732년 - 삼천 서원 묘정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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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98년 - 삼천 서원 묘정비 이전 |
원 소재지 | 삼천 서원 묘정비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산 1-1 |
현 소재지 | 삼천 서원 묘정비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13-14 |
성격 | 비 |
재질 | 백대리석 |
크기(높이,너비,두께) | 146.5㎝[높이]|57.5㎝[너비]|26㎝[두께]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 비석.
[개설]
옛 서원인 삼천 서원의 건립 경위와 제향 인물에 대해 기술한 비이다.
[건립 경위]
삼천 서원은 원래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산 1-1에 있던 옛 서원으로, 1667년(현종 8)에 용담 현령 홍석(洪錫)이 창건하여 안회(顔回),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 제갈량(諸葛亮) 등 중국의 현인(賢人)들을 배향하였다.
홍석의 지인(知人)이었던 우암 송시열은 서원을 세울 때 기문을 작성하기도 하였으나 송시열이 실각된 뒤에는 반대파들에 의해 삼천 서원이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송시열이 복권되자 이듬해 사액(賜額)을 받고 복향(復享)을 하여 서원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묘정비는 서원이 복향한 뒤인 1732년(영조 8)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에는 판중추 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복설 비문(復設碑門)이 실려 있어서 저간의 전말을 읽을 수 있다.
[위치]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태고정 옆에 있다. 원래는 용담면 수천리 산 1-1번지에 있던 옛 삼천 서원의 뜰에 세워져 있었으나, 용담댐 건설 이후 삼천 서원 자리에 망향의 동산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지방도 795호선에서 용담 방면으로 이동하면 진용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도달할 수 있다. 망향의 동산 안에서 충혼탑이 있는 곳을 따라가다가 용담호가 보이는 반대 방향에 보면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형태]
비대석이 없이 비신에 가첨석을 올려 놓은 형태이다. 높이 146.5㎝, 너비 57.5㎝, 두께 26㎝이다.
[금석문]
비석의 전면과 후면에 걸쳐 ‘삼천 서원 묘정비(三川書院廟庭碑)’라는 글자를 상단에 전서로 새겼고, 그 전서 바로 밑에 삼천 서원의 건립 내력을 빼곡히 새겨 놓았다. 비석의 전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원제는 ‘복설 비문(復設碑門)’이다. 비문은 행판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지었으며, 전 행사헌부집의 어유봉(魚有鳳)이 글씨를 썼으며, 경기도 관찰사 순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 개성 부유수 강화 부유수 홍현보(洪鉉輔)가 전액(箋額)을 썼다.
내용은 “전라도 용담현에는 삼천 서원이 있어 안자와 양 정자, 주자 및 제갈무후를 봉사하고 있다. 무릇 제도(諸道)의 주현(州縣)에는 각기 향교가 있어 공성(孔聖)을 봉사하고 안·정·주(顔程朱) 4부자(夫子)를 배식(配食)하고 있다. 그러나 겹쳐 제사지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며, 또 자고이래로 영현(英賢)이 많은데 어찌 유독 무후만 제사를 지낼 일이던가? 이 고을의 북쪽에는 이른바 안자동(顔子洞)이 있고, 남쪽에는 정자천(程子川)이 있으며, 서쪽에는 주자천(朱子川)이 있는데 와룡암(臥龍巖)이 그 중앙에 있다. 당초에 명명한 내력을 지금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산천과 암동(巖洞)이 옛날 현인의 성자(姓字)나 칭호가 착착 부합하니, 일이 참으로 기이하고 광영을 입은 바도 크니 제사지내는 일이 근거가 없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고을은 깊은 산골에 위치하여 풍속도 유치하고, 수재(守宰)도 일을 좋아하여 드러낸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매몰하게 방치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현종(顯宗) 7년 병오(丙午)에 남양(南陽) 홍후(洪侯) 석(錫)이 현령이 되었는데, 후는 유(儒)를 좋아하고 고(古)에 독실한 선비이다. 도임하자마자 개연히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일으켜 회옹(晦翁)[주자(朱子)를 지칭함]의 남강(南康) 고사(故事)를 본받아 고을의 제생(諸生)을 창도(倡導)하여 현치(縣治)의 용연(龍淵) 위에 사우(祠宇)를 짓고, 안·정·주 4부자는 동쪽에 모시고, 무후는 서쪽에 모시고 이듬해 6월 정축(丁丑)에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니, 우암(尤庵) 송선생(宋先生)이 글을 지어 기술하였다. …… 대광보국 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찬하고, 통훈 대부 전행사헌부집의 어유봉(魚有鳳)이 글씨를 썼으며, 가선대부 경기도 관찰사 순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 개성 부유수 강화부 유수 홍현보(洪鉉輔)가 전액(箋額)을 쓰다. 영종(英宗) 임자(壬子) 9월에 세우다.”라고 되어 있다.
[현황]
1998년에 태고정과 더불어 망향의 동산으로 이전되었다.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망향의 동산에는 용담댐 건설로 태고정 등과 함께 이전하여 온 모두 9기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삼천 서원 묘정비는 맨 오른쪽에 서 있다. 그러나 좌대를 너무 깊이 땅에 묻어서 비의 아랫 부분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 비석의 마모는 심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뒷면의 두 곳이 크게 훼손되어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삼천 서원 묘정비의 비문은 송시열과 어유봉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와 서예가들이 참여하여 쓴 비문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