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광복 기념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796
한자 大韓光復紀念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7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56년연표보기 - 대한 광복 기념비 건립
현 소재지 대한 광복 기념비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78 지도보기
성격
재질 오석
크기(높이,너비,두께) 192㎝[높이]|87㎝[너비]|43㎝[두께]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기 위한 비.

[개설]

1956년에 진안 군민들이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묘 경내에 대한 광복 기념비를 세웠다.

[건립 경위]

1956년에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진안 군민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비의 전면에 각자된 ‘대한 광복 기념비(大韓光復紀念碑)’라는 휘호를 직접 쓰고, 부통령 함태영이 후면의 비문을 썼다.

비가 건립된 장소인 이산묘면암(勉菴) 최익현의 제자들과 연재(淵齋) 송병선의 제자들이 각기 제자들의 모임을 결성한 후 건립한 곳이다. 한말 국권 수호를 위해서 창의(倡義)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며, 일찍이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에 머물렀던 곳으로 조선 태조의 건국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위치]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묘 경내에 세워져 있다. 이산묘진안군 마이산 도립 공원에 위치해 있는데, 마이산진안 군청에서 중앙로를 따라 600m 이동한 뒤 마이산로를 따라 2.2㎞ 이동하면 나온다. 마이산 남부 주차장 부근에서 100m 직진하면 오른쪽에 이산묘가 있다.

[형태]

마이산의 자연석을 거북 좌대로 깎아 만들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상단에는 용트림 문양의 이수를 얹었다. 어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192㎝, 너비 87㎝, 두께 43㎝이다.

[금석문]

비표(碑表)에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초서로 ‘대한 광복 기념비(大韓光復紀念碑)’라고 쓴 글자가 새겨져 있고, 비음(碑陰)에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이 짓고, 배길기(裵吉基)가 글씨를 쓴 비명이 새겨져 있다.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아보건대 경술년(庚戌年) 국치(國恥)의 날 강산(江山)과 여민(黎民)이 눈물에 잠긴 뒤로 풍풍우우(風風雨雨) 삼십유육년(三十有六年) 혹은 망명(亡命)의 길을 떠나 조국 광복(祖國光復)을 위(爲)하여 분골 쇄신(粉骨碎身)한 이 얼마였으며, 또 혹(或)은 국내(國內)에 머물러 지조(志操)로써 항쟁(抗爭)하다가 철창하(鐵窓下)에 희생(犧牲)된 이 얼마였더뇨. 그러나 마침내 정의(正義)의 공도(公道)가 돌아오니, 을유(乙酉) 팔월십오일(八月十五日) 선열(先烈)의 적공(積功)과 자유 우방(自由友邦)의 승리(勝利)로 일제(日帝)의 추적(醜跡)은 물러가고 또다시 3년후(三年後)인 무자(戊子) 팔월십오일(八月十五日) 자주 정부(自主政府)를 입(立)히니, 이는 삼천만(三千萬)이 모두 다 원(願)하던 바 호남(湖南)의 진안(鎭安) 부노(父老)들이 또 그 감격(感激)을 금(禁)치 못하고, 그 고장 마이산하(馬耳山下)에 일편석(一片石)을 세워 이를 영구 기념(永久紀念)코자 하여 이대통령(李大統領)의 제자(題字)를 구(求)함과, 아울러 내게 기문(記文)을 청(請)키로 아직도 국토 통일(國土統一)의 대업(大業)은 성취(成就)되지 못한 채나마 이에 광복 사적(光復事蹟)을 약기(略記)함으로써 제현(諸賢)의 참된 뜻을 길이 후세(後世)에 전(傳)하는 바다. 단기(檀紀) 4289年 1月 대한민국(大韓民國) 부통령(副統領) 함태영(咸台永). 배길기(裵吉基) 전(篆) 병서(竝書)”

[현황]

대한 광복 기념비는 현재 시도 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는 이산묘의 경내에 비각을 세워 온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이산묘에는 대한 광복 기념비 외에 회덕전(懷德殿), 영광사(永光祠), 영모사(永慕祠) 등 진안의 주요 문화 유적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한 광복 기념비는 광복과 정부 수립에 대한 당시 진안 군민의 자긍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이 짓고 쓴 비문이라는 점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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