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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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雙溪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산 3-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경미 |
건립 시기/일시 | 1886년 - 쌍계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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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5년 - 쌍계정 보수 |
현 소재지 | 쌍계정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산 3-3 |
성격 | 정자 |
양식 | 초익공 3량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함양 오씨 종중 |
관리자 | 오재희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 있는 개항기 누정.
[개설]
쌍계정은 두 개의 냇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세웠다고 하여 이름을 얻었다. 즉 백운천과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솥내 마을에서 남으로 흐르는 시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졌다. 그 때문에 ‘쌍계정(雙溪亭)’ 또는 ‘쌍계정(雙磎亭)’으로 불리고 있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우(李友禹) 등이 발의 출원하여 세운 누정으로 쌍계동 천현계(雙磎洞天賢稧)의 계원 이양규(李揚奎) 등 36여 명[일설에 의하면 50명]의 명단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쌍계정의 후벽 바위에 고운 최치원이 쓴 ‘쌍계석문’의 4자를 모방하여 새긴 글씨가 있는데 1956년 손운이 모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치]
덕태산 아래 백운동 마을에서 발원한 백운천과 평장리 솥내 마을에서 남으로 흐르는 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건립되어 있다. 마령면 소재지에서 백운 방향으로 임진로를 따라 약 4㎞쯤 가다가 우측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100m쯤 산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 동굴 속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쌍계정이 지어진 시기는 1946년보다 전으로 올라가 1900년 이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유는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1908년(융희2) 매천이 54세 되던 해에 지은 시 「진안의 쌍계정에서[鎭安雙溪亭]」이 『매천집』 제5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붉은 적벽 반반한데 벽옥같은 물 흘러와/ 두 냇물이 흘러와서 자그마한 모래섬 이루었네/ 많은 봉우리에도 길은 있으련만 알 길이 없고/ 한 버들과 단풍나무엔 가을 기운이 뻗쳤네/ 지팡이 짚는 소리에 박쥐들 놀라 흩어지고/ 난간에 기대니 그림자와 개와 새우 떠다니네/ 어찌 절경이 평범한 곳에 있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만/ 오악을 구경하다 보니 부질없이 머리만 희었네.” 라고 노래하고 있어 이곳 쌍계정을 대상으로 지은 시로 추정된다. 따라서 쌍계정은 1900년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1985년 보수 이후 2011년부터 문화재 돌봄 사업단에 의해 지속적인 예찰 및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도한이 1886년 「쌍벽정기」에 “이 정자는 단청의 호사스러움으로 아름다움을 삼지 않고 물과 바위의 기특함으로 뛰어남을 삼았다. 진안의 동쪽에는 백운산과 선각산이 높다랗게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데 백운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증산이 되고 증산의 북쪽에는 석벽이 우뚝 섰는데 극히 괴괴하여 귀신이 자귀와 도끼로 깍고 찍어낸 듯 별스런 조화의 형적이 나타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형태]
쌍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건물이다. 콘크리트 기초 위에 잘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는 우물마루로 가설되었고 대들보와 충량은 곡재를 사용하여 자연미를 더하고 있다. 창방으로 각 기둥을 위에서 연결하였으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장식적으로 끼운 소로수장 건물이다.
1985년에 보수한 뒤 관리되고 있으며 옥개부 이상은 많은 부분이 퇴락되었다. 암반에서 흐르는 물이 부재에 튀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진각 지붕으로 알려졌지만 충량의 구조로 보아 팔작지붕이었을 가능성이 놓다. 지붕은 기와지붕 위에 판형의 기와 형식 철판을 덧씌웠다. 기둥에만 석간주 가칠이 되었고 대들보, 창방, 도리장여, 서까래 등은 박락된 상태 그대로이다.
[현황]
1985년에 보수한 뒤 2011년 이후 문화재청 및 전라북도청의 문화재 돌봄 사업단에 의해 지속적인 관리가 진행되고 있다. 암반에서 흐르는 물이 주변에 습기를 머물게 하기 때문에 목조 재료에 충해 및 흰개미의 피해가 예견되며 단청의 많은 부분이 박락되었다.
우진각 지붕으로 알려졌지만 충량의 구조로 보아 팔작지붕이었을 가능성이 놓다. 지붕은 기와지붕 위에 판형의 기와 형식 철판을 덧씌웠다. 기둥에만 석간주 가칠이 되었고 대들보, 창방, 도리장여, 서까래 등은 박락된 상태다. 기둥의 자연 건조에 의해 수축된 부분은 인공 수지로 처리하여 충해에 대한 예방적 처리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암반 사이에 세워진 건물로 여름에는 다소 사용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나 겨울철은 사용이 불가하다. 이로 인해 낙엽의 적재가 발생되어 지붕을 기와꼴 함석으로 개보하여 정자의 고유한 분위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