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현읍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46
한자 -鎭安縣邑誌-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791년연표보기 - 『진안현읍지』 편찬
소장처 『진안현읍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읍지
저자 진안현
편자 진안현
간행자 진안현
표제 진안현읍지(鎭安縣邑誌)

[정의]

1791년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편찬된 읍지.

[개설]

『진안현읍지』는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읍지로 1791년(정조 15)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편찬/간행 경위]

『진안현읍지』의 정확한 편찬 연대는 미상이지만 그 안에 실린 선생안(先生案)[역대 수령 명단]의 기록이 1791년(정조 15)까지 기재된 것을 감안하면 그 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서지적 상황]

『진안현읍지』의 편저자는 진안현이다. 필사본으로서 간행지는 미상이다.

[형태]

『진안현읍지』는 1책 9장이고 크기는 길이 30.2㎝, 너비 21.4㎝이다.

[구성/내용]

『진안현읍지』의 내용은 건치 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관직(官職)·방리(坊里)·도로(道路)·성씨(姓氏)·풍속(風俗)·학교(學校)·단묘(壇廟)·공해(公廨)·관애(關隘)·봉수(烽燧)·제언(堤堰)·장시(場市)·교량(橋梁)·역원(驛院)·사찰(寺刹)·누정(樓亭)·형승(形勝)·물산(物産)·진공(進貢)·상납(上納)·호구(戶口)·전총(田摠)·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봉름(俸廩)·요역(民役)·창고(倉庫)·조적(糶糴)·군기(軍器)·군액(軍額)·노비(奴婢)·선생안(先生案)·인물(人物)·과환(科宦)·고적(古蹟)·책판(冊板) 등이다.

건치 연혁에서는 진안현의 역사를 간략히 기록하였다. 진안현은 본래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으로 월량(月良)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었으나, 1391년(공양왕 3)에 마령현(馬靈縣)이라 고치고 전주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 시대인 1413년(태종 13)에 다시 진안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군명에는 월량·진안 등 역대 명칭을 기록하였다. 관직으로는 현감 1인·좌수 1인·별감 2인이 있었다. 방리에는 읍내면(邑內面)·상도면(上道面)·하도면(下道面)·탄전면(吞田面)·여면(與面)·두미면(斗尾面)·마령면(馬靈面)·일동면(一東面)·이동면(二東面)·일서면(一西面)·이서면(二西面)·일북면(一北面)·이북면(二北面)·삼북면(三北面) 등 14개 면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도로에는 주변 군현과 서울·감영·병영·수영까지의 거리를 기록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진안까지의 거리는 508리로 이동하는 데 7일이 소요되었다. 성씨에서는 현에 거주하는 각 성씨와 본관을 기록하였다. 풍속에 대해서는 “땅은 높고 사람은 순박하며 선비는 문예를 숭상하고 백성은 농상을 한다.”고 서술하였다. 학교·단묘·공해·관애·봉수·제언·장시·교량·역원·사찰·누정 등은 모두 현의 각 시설을 소개한 것인데, 이 중 관애와 봉수는 없다고 하였다. 형승에서는 마이봉(馬耳峯)을 소개하였다. 물산으로는 벌꿀·옻·닥나무·마 등을 제시하였다. 진공은 시기별로 진상하는 물산을 기록한 것이며, 상납은 각 관청에 바치는 포를 기록한 항목이다. 상납하는 관청으로는 장악원·호조·공조 등을 제외한 대부분이 군사 관련 관청들이었다.

호구에는 진안현의 인구를 기록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 진안현에 5,767호 2만 2211명이 거주한다고 파악되었다. 전총은 현 내의 전결을 파악한 항목으로 전답을 모두 합치면 총 3,310결 88부 2속이었다. 이러한 수치로 보아 당시 진안현은 중간 규모의 고을이었던 것 같다. 전세·대동·균세 등은 세금에 대한 항목이며, 봉름은 관리들에게 제공하는 봉급을, 요역은 역(役)과 관련된 항목이다. 창고 항목에는 현 내의 각 창고를 기록하였고 조적은 환곡 운영에 관한 항목이다.

군기에는 각종 군사 기물을 종류 및 수량에 따라 정리해 놓았고 군액은 현 내 군병의 소속별 인원수를 기록했다. 노비는 관노비의 소속과 수를 기록한 항목이다. 선생안에는 역대 수령을 기록하였는데 마지막으로 기록된 수령이 1791년(정조 15)에 부임한 윤영희(尹永僖)이다. 인물에서는 진안 출신의 명신·효자·열녀 등을 소개하였고 과환은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한 인물들을 기록한 항목이다. 고적 항목에서는 주변의 사적지 및 명승지를 소개하였다. 책판 항목에서는 없다고 기록하였다.

진안에 관한 읍지류로는 『호남 읍지(湖南邑誌)』·『전라북도 각군 읍지(全羅北道各郡邑誌)』 등이 있으나, 『진안현읍지』가 이들보다 앞서 작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진안현읍지』 보다 앞선 기록으로는 18세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가 있다.

[의의와 평가]

『진안현읍지』는 비록 분량이 많지 않지만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18세기 진안현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비록 후대의 필사본이지만 18세기 말의 기록물로서 진안 지방의 읍지류 간행물들을 연결해주는 특징을 갖는다. 『진안현읍지』와 다른 읍지류의 비교를 통해 진안 지역의 사회 경제적 변화 및 중앙의 지방 파악 방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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