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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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傳-元蘆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선아 |
[개설]
원노촌 마을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에 있는 거창 신씨 집성촌이자 효자 마을이다. 원노촌 마을은 대대로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서 마을 출신 ‘미계 신의련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에는 충효사, 영모정, 신의련 효자각 등이 있어 지금도 효자 신의련의 이야기가 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개요 및 명칭 유래]
전라북도 진안의 남부에 해당하는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은 덕태산, 성수산, 911봉에 둘러싸여 있다. 2013년 현재 27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 중 25가구가 거창 신씨이거나 또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집이고, 다른 성씨로는 남원 양씨와 함안 조씨가 각각 1집씩 있는 마을로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전체 인구는 56명으로 남자 25명과 여자 31명이 거주하고 있고, 독거노인도 몇 명이 있다.
2003년 발간된 『한국 지명 총람』에 노촌리는 ‘갈거리’라고도 하는데, 본래 진안군 일동면 지역으로 앞내에 갈나무가 많았으므로 갈거리, 갈걸, 또는 노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2004년 발간된 『진안군 향토 문화 백과사전』에는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가는 형국으로, 나는 기러기가 갈대를 머금어야 조화를 부린다고 하며, 노촌리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장을 맡아왔던 주민 신재환[1938년생]과 신을범[1942년생] 등은 ‘마을 뒷산이 기러기 형국으로 기러기가 갈대[마을 앞 날등]에 앉으려는 형국, 즉 안노형국(雁蘆形局)이라며 여기에서 유래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효자 신의련 이야기가 살아있는 원노촌 마을]
신의련(愼義連)[1546~1606]의 자는 의숙(宜叔), 호는 미계(美溪), 본관은 거창으로 양렬공(襄烈公) 신이충(愼以衷)의 7대손이다. 1581년(선조 14) 백운 노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한 겨울에 꿩과 잉어를 구하여 간호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의련은 전란 중에도 부친의 간호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난을 피하기 위해 신의련이 살고 있는 깊숙한 산골에 들어왔다. 그곳이 오늘의 비사동 골짜기이다.
한편, 왜군들이 신의련의 집에 침입하자 신의련이 방문 앞을 가로 막으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병석에 누워 계신 우리 부친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고 이에 감동한 왜장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나 효성을 실제로 보기 위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효자 신의련’ 다섯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신의련이 다섯 글자를 써서 왜장에게 주니 종이를 불태웠지만 ‘효자 신의련’ 다섯 글자는 불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이를 본 왜장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감탄하면서 귀중품을 주고 ‘이 곳은 하늘이 아는 효자가 살고 있으니 침범하지 말라’는 표방을 동구 밖에 써 붙이고 부하들을 데리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 때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1만여 명이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골짜기를 ‘만인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에도 여전히 왜적이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신의련의 덕이라고 여겼으며, 미계촌 앞에 높이 솟아 있는 산을 덕태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계촌은 지금의 원노촌의 다른 이름이다. 전쟁이 끝나고 신의련이 죽은 후에 이 이야기를 들은 고을 원님이 선조에게 고했고, 종8품에 해당하는 수의부위(修義副尉) 라는 벼슬을 증직하고 효자각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충효사 상량문과 ‘백운’]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 끝자락에 있는 사당인 충효사는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과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의 충절, 그리고 미계 신의련(愼義連)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856년(철종 7)에 창건하였다. 그러나 1869년(고종 6)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47년 복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창 신씨 족보에서 발췌한 충효사 상량문에는 ‘백운’이라는 고을 지명의 유래를 짐작케 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복이시례지가백세가법(伏以詩禮之家百世可法) 조두지소사유수존(俎豆之所四維修尊) 채미지구묘영전벽산금일(採薇之舊廟永傳碧山今日) 읍죽지유허(泣竹之遺墟) 상기백운하년(尙記白雲何年) 지인야(之人也) 강월랑지촌(降月浪之村) 천조지설(天造地設) 기덕칙유풍초지언(其德則有風草之偃) 과화존신(過化存神) 행인(行人) 지점이도금(指點而到今) 다사심열이성복(多士心悅而誠服)”[삼가 생각하건대, 시례(詩禮)를 익힌 집안은 오랫동안 본받을 수 있고 제사를 모시는 곳은 사방에서 공경한다. 채미(採薇)[백이와 숙제]의 묘는 오늘날까지 푸른 산에 전하여지고 읍죽(泣竹)의 유허가 아직도 백운(白雲) 땅에 기억된 것이 몇 해이던가. 그 사람이 월량(月浪)의 마을에 내려오니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푼 것이요, 그 덕은 풀 위에 바람이 일면 풀이 누운 것과 같으니 지나가면 교화가 되는 신(神)같은 존재라. 길 가는 행인이 가리키며 지금에 이르렀고 많은 선비가 마음으로 즐거워하며 진실로 감복하였다.]
이렇듯 노촌리가 위치한 백운면의 마을 유래가 됨직한 어귀를 충효사 상량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백운’은 백운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많다. 『광여도』, 『대동여지도』, 『여지도』 등 고지도에 진안 읍내에서부터 마이산, 백운산, 내동산이 차례로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백운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재 지도와 비교해 본다면 고지도 상의 백운산은 현재 진안 성수산 정도로 추정된다. 성수산은 조선 태조와 관련된 설화가 전하는 곳으로 결국 백운산이 성수산이 되었고, ‘백운’은 그대로 남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운’은 ‘효’라는 단어가 함께 한다. 당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병주 법조참군(幷州法曹參軍)으로 나가 있을 때 부친이 하양(河陽)에 있었으므로, 그가 태행산(太行山)에 올라가 하양 땅을 돌아보다가 흰 구름이 외로이 나는 것을 보고는 좌우에 말하기를, “우리 어버이가 저 밑에 계신다.” 하고, 한참 동안 슬피 바라보다가 구름이 사라진 뒤에야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또한 조선 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서거정도 ‘백운(白雲)은 효자(孝子)가 어버이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백운’이라는 지명은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의 ‘백운 고사’에서 보는 것처럼 부모를 그리는 마음의 시각적 표현으로 백운 땅의 효자인 신의련을 비롯한 효자·효열들이 많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충효사 상량문에 나타나 있는 ‘백운’은 신의련의 효행을 백운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배경이 백운 땅에 있는 백운동(白雲洞)이라는 지명과 중첩되면서, 1914년 일동면과 남면을 합쳐 행정 구역을 조정하고 명칭을 상고할 때 백운(白雲)이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의련 효자각]
신의련 효자각은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과 마재 갈림길 어귀 길 옆에 있는 효자각이다. 선조 때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의 효자각은 현전하지 않으며, 현재의 신의련 효자각은 1801년(순조 1)에 세워진 것으로 중수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건물은 기와 팔작지붕이며 효자각 옆에는 ‘미계 신선생 유적비’가 세워져 있고 건너편에는 영모정이 있다.
[영모정]
영모정은 전라북도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정자 중에 하나이다. 백운면 평장리에서 노촌리 방향으로 약 1.5㎞ 지점 천변 숲 한가운데에 있다. 거창 신씨 문중에서 1869년 미계 신의련(慎義連)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1×1칸 규모에 지붕은 너와, 즉 점판암 돌기와를 올렸다. 누각 아래 사면의 각기둥은 거북이 머리 모양의 원형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단순 가공한 원형 주춧돌을 이용하였다. 정면에 있는 4개의 기둥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건립된 까닭에 다른 것보다 1m 정도 더 내려와 있다. 누정(樓亭) 남쪽 내부의 중앙에는 ‘영모정’이 아니라 ‘영벽루(影碧樓)’라 쓰인 현판과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윤성진(尹成鎭)이 지은 상량문(上樑文)이 걸려 있다.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거창 신씨 신용권 소장 고문서]
거창 신씨 신용권 소장 고문서는 1854년[갑인년], 1855년[을묘년], 1856년[병진년]에 각각 올린 상서(上書)이다. 미계 신의련의 행적은 이미 선조 조에 ‘수의(修義)에 증직하여 품계를 내리고, 특별히 정려(旌閭)를 내렸다.’고 하지만 ‘임란 이후 남아있는 자손들이 쇠락하였고, 문헌(文獻) 또한 흩어져서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이 지금까지 이루어지 않았다.’면서 사우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후 거창 신씨 재각으로 1856년(철종 7)에 충효사가 건립되었는데 이 고문서는 충효사 건립을 위한 상소이며, 인장으로 마패가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총 115명의 연명 상소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