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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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學-金致寅-亂世克復-時代-到來-挑戰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순철 |
[개설]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남학(南學)’은 1860년 ‘동학’의 발생을 전후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역을 중심으로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가 유·불·선 사상을 삼합하여 창시한 종교이다. ‘남학’에 대하여 학계에 가장 먼저 소개한 사람은 국학자 이능화(李能和)[1869~1943]이다. 그는 이운규의 유·불·선 사상을 ‘남학’이라고 규정하고, 남학을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 또는 대종교(大宗敎)로도 불렀다. 대략 동학(東學)과 동시에 호서(湖西)에서 시작하여 이운규가 제1세 교주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이강오는 “남학은 유·불·선을 혼합한 종교이지만, 일부계(一夫系)는 유교를 중심으로 불·선을 흡수하였고, 광화계(光華系)는 불교를 중심으로 유·선을 흡수하였는데 이들을 모두 남학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특히 광화계를 남학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남학의 교조로 받들어지는 연담 이운규는 1804년(순조 3)에 세종의 아들 담양군의 13세손으로 충청남도 천안 목천에서 출생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문과 참판(文科 參判)을 지냈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학통으로는 북학계의 강산 이서구의 뒤를 이었다. 국운이 쇠미하여지자 58세 때인 1862년 이후 서울을 떠나 연산 띠울[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곳에 은거하면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게는 선교를 새롭게 탐구하여 ‘동학’을 창도하게 하고, 일부(一夫) 김항(金恒)에게는 유교를 새롭게 탐구하여 ‘정역(正易)’을 창도하게 하였다. 1879년 이전에는 진안 용담[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으로 옮겨 광화 김치인의 ‘남학[처사교, 오방 불교]’을 창도케 한 후에, 1888년을 전후하여 대불리를 떠나 고향인 목천으로 돌아갔다.
이운규의 주요 제자로는 그의 아들 부연(夫蓮) 이용래(李龍來)와 일수(一守) 이용신(李龍信), 일부(一夫) 김항(金恒), 광화(光華) 김치인(金致寅)이 있다. 김항은 이운규가 은거한 연산 모촌리와 인접한 남산리(南山里)[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 거주하였다. 김항은 유·불·선(儒佛仙)에 해박한 이운규가 은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1861년 36세의 나이로 그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김치인은 이운규와 더불어 주로 이용래에게 나아가 수학하고 이용신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유·불·선 합일 사상을 지향한 이운규의 계열은 크게 두 계열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여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항 계열이다. 다른 하나는 아들 이용래와 이용신으로 계승되어 김치인에게 전승된 계열이다.
김치인은 이운규와 그의 아들 이용래·이용신이 진안군 용담(龍潭)에 거주할 무렵에 10대 후반의 젊은 청년으로 그들의 유·불·선 사상을 접하였다. 또한 김치인은 이운규와 그 자제들이 무주군 후령(後嶺)으로 옮겨 수도하고 후학을 가르쳤을 때도 약관의 나이로 무주에 반거(搬居)하면서 따랐다. 이리하여 김치인은 이운규의 아들 이용래에게 나아가 수학한 이후 선사 이운규와 같이 여러 영산들을 찾아 심신을 수련하면서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교학(敎學)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교학은 불가·선가의 신령설(神靈說)을 중심으로 유교의 윤리설(倫理說)을 전개한 것이다.
[남학 김치인의 생애와 활동]
김치인(金致寅)[1855~1895]은 1855년 7월 19일 학주공(鶴洲公) 홍욱(弘郁)의 후예로 진안군 이서면 장등리[현 진안군 주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광화(光華)이다. 태몽에 의하면, 모친이 꿈속에서 북두칠성 가운데 첫 번째 추성(樞星)의 빛이 집과 방안에 가득 비치고 나서 14개월 만에 낳으니 눈썹이 아름답고 눈이 빛났다고 한다. 그의 호 광화는 “하늘에 해·달·성신(星辰)이 있어 그 빛이 화려한데 그 빛의 화려함에 부합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도를 깨우친 뒤에는 “널리 창생(蒼生)을 구제한다.”는 의미에서 광제(廣濟)로 개명하였다.
김치인은 궁벽한 곳에서 태어나 몹시 가난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다. 9세 때에 겨우 『효경(孝經)』으로 학문에 입문하여 경의(經義)를 터득하였고 13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3년 상을 마치고 16세 무렵 용담 대불리 중리 마을[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 있는 외가 김재영(金載永)의 집에서 거주하였다. 항상 주경야독하며 모친의 봉양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애목우제(愛睦友弟)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20세 때 무주현(茂朱縣) 후령(後嶺)으로 이주하였는데 삶의 터전을 찾아서 간 것이 아니라 남학의 교조 이운규와 그의 장자 이용래 등의 무주 유람과 강학에 동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이용래는 김치인에게 “너는 바탕이 심히 노둔하니 먼저 세속적인 흉금(胸襟)을 씻고 심규(心竅)를 열어낸 이후에야 점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구령주(九靈呪)를 주고 끊임없이 암송하도록 하였다. 구령주는 ‘구령삼정주(九靈三鼎呪)’의 준말로 도교의 『옥추경(玉樞經)』에 있는 주문이다. 다음해 그는 연산현(連山縣) 덕동(德洞)으로 옮겨 학문과 수련에 매진하였다.
22세 되던 1876년 음력 10월에 스승을 모시고 청양(靑陽)에 사는 스승의 지인인 조씨(趙氏)를 방문하였다. 그때 김치인이 빈 회랑에서 ‘구령주’를 은미하게 암송하니 천상의 옥동(玉童)들이 내려와 피리불고 춤추며 표연히 사라졌고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듬해 진잠현(鎭岑縣) 철동(鐵洞)으로 옮기고 옥천군(沃川郡) 신원사(新院寺)로 가서 수도(修道)하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3년 후에는 전주부 회문산(回文山) 자락의 묵동(墨洞)으로 옮겨 수도하였다.
27세 때인 1881년 3월 고산현(高山縣) 선야봉(仙冶峯) 골짜기로 옮겨서 서실을 짓고 정거(靜居)하면서 이치를 궁구하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錦山) 암삼리(岩三里)로 옮겨 수도하였다. 마을 뒷산 봉우리에는 신성한 뛰엄 바위와 세 개의 큰 바위들이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영적(靈的) 자연물에 대한 감응적(感應的) 구도(求道)를 하였다. 1882년 무렵에는 그곳을 떠나 은진현(恩津縣) 장승(長承) 골짜기로 옮겼다. 다음해인 1883년 그의 나이 30세에 윤상태(尹相泰)의 딸과 결혼을 하였으며, 1885년에 김경배(金敬培)와 김용배(金庸培)[1876~1941] 형제를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들 형제는 수렵에 빠져 있었는데 김치인은 호생(好生)의 가르침을 베풀어 수렵의 취미를 버리고 도(道)에 나아가도록 하도록 하였다. 35세 때인 1888년 대둔산(大芚山) 석천암(石泉庵)으로 옮겨 수도할 때엔 병자를 치료하는 신통력을 발휘하였고, 36세 때엔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추기도 하였다. 38세 때에는 제자 김용배의 손을 잡고 “우리의 도체(道體)는 더 이상 확대하여 보충할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도(道)에 입문하는 자 가운데 특별히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도를 확대하지 못하는 까닭이니 어찌 다른 사람을 허물하겠는가!”라고 하여 성실히 수도하여 도를 확대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김치인은 종교적 신념과 도덕적 윤리를 토대로 처사교(處士敎)를 창교하여 어려운 민생의 구심적 역할을 하면서 보국(輔國)하고자 하였다.
1893년 봄 39세 때 진안군 대불리(大佛里) 중리(中里)로 돌아와 많은 후학을 양성하다가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보국을 위해 5만 명에 달하는 남학군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참된 진리에 대한 체현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남학에 의한 처사교[오방 불교]를 만들어 사회 운동을 전개하여 잘못된 국시(國是)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거사 이전에 관군의 습격을 받아 자신을 포함하여 간부들이 체포되어 1895년에 전주 서문 밖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나이 41세였다.
[김치인의 사상과 수련법]
김치인은 10대 중후반까지 진안 대불리(大佛里)에 거주하였다. 이운규는 두 아들과 함께 진안에 머물며 많은 문인들을 훈도하였다. 당시 김치인은 그들의 유·불·선 사상을 접하여 알고 있었다. 이후 이운규와 두 아들이 무주로 옮기자 김치인은 큰 아들 이용래에게 나아가 수학하였고 나중에 이용신과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이운규의 유·불·선 합일 사상을 계승한 그의 아들 이용래와 이용신의 사상은 김치인(金致寅)에게 계승되고 김치인의 사상은 그 문인들에게 계승되었다.
김치인은 인간 모두에게는 부여받은 떳떳한 본성이 있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率性之謂道]’는 말을 이미 들었으므로 스승에게 직접 나아가 몸소 가르침을 받는 일이 없어도 끊임없는 자강(自强)의 노력이 있다면 도를 닦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그는 주희(朱熹)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의 주석에서 언급한 한나라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도의 큰 근원은 천(天)에서 나온다.”는 말을 원용하여, “하늘엔 두 가지 ‘도’가 없으니 두 가지 의리의 떳떳함이 없다.”고 하였다. 동중서의 ‘천’은 인격을 가지고 의지를 가진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김치인은 주희의 『중용』 제1장에 대한 이해와 동중서의 ‘천관(天觀)’을 넘어 종교적 신념으로 이 말을 해석하여 초월적 존재와 세계에 대하여 궁극적 진실로 수용한 것이다. 그는 또한 ‘천’에서 나온 ‘도’의 큰 근원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사유 양식으로 드러났음을 언표 하였다. 그는 “이른바 유교와 불교의 명칭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동일하다. 내가 유교나 불교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마는 모두 취하고 버림이 없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佛)’이란 사람이 아니니[불인(弗人)] 신명(神明)이고, 유(儒)란 필수적인 사람이니[유인(需人)] 사물이다. 사물은 외적으로 드러나 행동하고 신명은 내적으로 텅 비고 신령스럽다. ‘음(陰)’과 ‘양(陽)’으로 말하면 불교는 ‘음’이고 유교는 ‘양’이다. ‘체(軆)’와 ‘용(用)’으로 말하면 불교는 ‘체’이고 유교는 ‘용’이다. ‘음’과 ‘양’, ‘체’와 ‘용’은 서로 필요하여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분리될 수 있다면 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여 유교와 불교가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도의 측면에서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광화 김처사 법언록』에는 “도의 근원은 하나에서 나왔는데 교명은 세 개가 있으니, 이치의 무극(無極)과 태극(太極)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배운다면 유교가 되고 불교가 되고 선가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궁극적 도는 유·불·선을 포함한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를 구분하여 한 영역만을 고수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현상계의 다양성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기에 유·불·선을 합설(合設)하는 것은 색은행괴(索隱行怪)와 고원난행(高遠難行)과 같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김치인과 그 일파가 불선의 입장에서 유교를 합설한 것은 19세기 내우외환 속에서 하나의 구심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진실하고 선한 본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진실하고 선한 본성을 지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일이다. 그는 “만물(萬物)에는 근본과 말엽이 있고 일[사(事)]에는 먼저 함과 뒤에 함이 있다. 만물의 근본이 되는 것은 부모이고, 일의 먼저 할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다. …… 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고 그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은 먼저 할 것을 뒤에 하고 뒤에 할 것을 먼저 하는 것이며 말엽을 두텁게 하고 근본을 엷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천하의 사람이 기뻐하여도 선(善)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친척이 기뻐하지 않으면 감히 밖으로 교류하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이 친밀하지 않으면 감히 먼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반드시 어버이를 어질게 하면서 만물에 미쳐가는 것이 선행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을 실현함에 있어 단계와 순서를 중시하는 것이다. 즉 엽등(獵等)하지 않는 본말적 사고와 선후적 사고는 선을 실현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본래 하늘에 나온 ‘도’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선의 실현은 유가적 사유 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그 궁극적 도는 유교 가운데 불가나 선가를 지향하고 있기에 유교적 명칭과는 차이가 있음을 천명하면서도 그 천도의 떳떳함을 지키고 그 인성의 벼리를 잡고자 하였다. 또한 김치인은 “미륵과 선불의 가르침은 마음을 측달자애(惻怛慈愛)에서 보존하고 본성을 청정과욕(淸淨寡慾)에서 기르며 집안에 들어가서는 그 부모를 섬기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그 장상(長上)을 섬기고 형제에게 우애하며 처자들을 즐겁게 하니 이것이 유교 가운데 선가이고 선도 가운데 불교이다. 유·불·선 세 가지 도가 함께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참으로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고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스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유·불·선 내함에 의한 윤리나 수련을 강조한 것이다.
김치인은 심신수련으로 ‘노래[가(歌)]’와 ‘춤[무(舞)]’을 말하였다. 노래는 길게 말하는 것이다. 노래할 때 오음(五音)을 위주로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윤리로서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오음은 우주 만물이 구체적으로 생성할 때 필수적 요소인 오행, 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이다. 이 오행에서 나오는 오음(五音)은 금(唫)·아(啞)·어(唹)·이(咿)·오(唔)이다. 김치인에 의하면 오음에 의한 노래의 사특하고 올바른 것이 곧바로 마음의 사특하고 올바른 것이다. 그 올바르고 선한 것을 취하여 성률(聲律)로 삼아 모든 사람이 절주에 맞춰 부른다면 천하를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특한 존재가 사람을 엄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래’에 의한 흥취가 넘치면 자연 ‘춤’으로 이어진다. 흥취는 일곱 가지 감정에서 나오는데 그 감정이 올바름으로부터 감응하면 올바르고 사특함에서 감응하면 사특하지만 그 두 가지 양상은 흥취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항상 인도(人道)의 정의를 생각하고 그 정의에서 흥취를 발현시켜야만 자연스럽게 수무족도(手舞足蹈)하는 올바른 춤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올바른 춤은 혈맥을 관통시키고 인간의 사특하고 더러운 것을 모두 씻어내는데 그러한 행의가 정묘(精妙)한 데까지 이르게 되어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면, 자연히 신인(神人)과 화합하는 경지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지인(天地人)이 모두 조화되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남학의 주요 문헌]
현재까지 남아 전하는 ‘남학’의 주요 자료로는 김항이 지은 『정역(正易)』, 광화 김치인이 남긴 『광화 김처사 법언록(光華金處士法言錄)』, 『금강 불교 연원록(金剛佛敎淵源錄)』, 『광화선생집(光華先生集)』, 『금강 칠성계 부인 명부(金剛七星契夫人名簿)』, 『한글 가사』 등이 있다.
『광화선생집』은 그 목록(目錄)에 「서사(舒事)」, 「도문(禱文)」, 「경문(經文)」, 「취지서(趣旨書)」, 「오음론(五音論)」, 「인과문(因果文)」, 「수신문(修身文)」, 「화복론(禍福論)」, 「보은록(報恩錄)」, 「영가장(詠歌章)」, 「무도장(舞蹈章)」, 「입실가(入室歌)」 등이 있고 부록으로 「제자문(弟子文)」이 있다. 『광화선생집』은 상당 부분 누락된 것이 있는데 「오음론」은 두어줄 정도의 내용만 있다. 그 다음 장에는 목록에 없는 「서사론(舒事論)」이 있는데 제자들이 김치인의 인품을 기술한 글이다. 그리고 편명 없이 “개자출취(皆自出就) ……”로 시작하는 불완전한 글도 실려 있다. 「서사」는 학문과 구도(求道) 과정에서 유·불·선 합일을 모색한 것을 기록한 것이고, 「도문」은 유·불·선에서 말한 신령한 존재인 별이나 신(神), 그리고 부처 등에게 기도하는 글이다. 「경문」은 도교의 책을 원용하여 쓴 주문인데, 그 첫줄에서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太上玄靈北斗本命蓮生眞經)”로 시작하는 것은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묘경(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妙經)』의 형식을 취한 것이고, 마지막의 “천생무령현주정중…(天生無靈玄珠正中…)”은 『옥추경(玉樞經)』에 있는 구령 삼정주(九靈三鼎呪)의 주문을 원용한 것이다. 「취지서」는 종교적 약규(約規)인데 9장 23조로 구성되었다. 이 「취지서」 제1장 교명칭(敎名稱) 제1조에 의하면 교명을 처사교(處士敎)로 칭하고 있다. 제2장 교학 목적(敎學目的)에는 1개의 조목이 있고, 제3장 위선 방법(爲善方法)에는 3개의 조목이 있으며, 제4장 수도 주의(修道注意)에는 2개의 조목이 있고, 제5장 공부 규칙(工夫規則)에는 6개의 조목이 있으며, 제6장 신심 수련(身心修鍊)에는 3개의 조목이 있고, 제7장 예식 정의(禮式正義)에는 1개의 조목이 있으며, 제8장 금지 정칙(禁止定則)에는 5개의 조목이 있고, 제9장 응용 사칙(應用事則)에는 2개의 조목이 있다.
『광화 김처사 법언록』은 김치인의 법언(法言)을 김용배(金庸培)가 1923년 집록하여 간행한 책으로 4권 1책이다. 책 앞부분에 단군교(檀君敎)의 정훈모(鄭薰謨)[1868~1943]의 서문, 통신원회판(通信員會辦) 강인규(姜寅圭)의 찬문 등이 있고 충청북도 관찰사 윤길병(尹吉炳)의 「법언총론(法言總論)」이 있다. 권1 내편(內篇)은 도법(道法)을 논하는 것으로 7장으로 구성된 바, 「도교(道敎)」·「위인(爲人)」·「옥성(玉成)」·「정심(定心)」·「보은(報恩)」·「독신(篤信)」·「통서(統緖)」 등이다. 권2 외편(外篇)은 덕업(德業)을 논한 것으로 6장으로 구성된 바, 「덕행(德行)」·「효우(孝友)」·「수신(修身)」·「화복(禍福)」·「인과(因果)」·「도현(道現)」 등이다. 권3 잡편(雜篇)은 가도(歌禱)를 논한 것으로 6장으로 구성된 바, 「오음(五音)」·「영언(永言)」·「예경(禮敬)」·「가도(歌蹈)」·「출처(出處)」·「입실(入室)」 등이다. 권4 부록(附錄)은 문인 김용배의 「행장(行狀)」과 「수록(隨錄)」, 후학 장인근·손병철·박재양의 「서행록후(書行錄後」 등이 있고, 마지막 장에는 김용배의 발문(跋文)과 같은 형식의 글이 있다. 내편은 교조 이운규로부터 김치인에게 전수되는 도법의 대강을 논하면서 ‘사람됨’·‘배움의 중요성’·‘은혜에 대한 보답’ 등을 논하였다. 외편은 교도들이 몸소 실천해야 하는 덕업을 기술하고, 잡편은 오음에 의한 영가무도 및 발원문(發願文), 출처와 입실의 등을 기술하였는데 특히 오음을 긴 소리로 내어 노래하듯이 암송하면 몸이 춤추는 듯한 신행(神行)을 묘사하고 있다. 정훈모는 서문에서 이 교의 교리가 유·불·선 삼교의 교법을 통섭한 묘도(妙道)라고 하였다.
『금강 불교 연원록(金剛佛敎淵源錄)』은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앞에 「금강 불교 연원록 서(金剛佛敎淵源錄序)」, 「삼찬기(三讚記)」, 「팔찬지(八讚誌)」 등이 있고, 그 다음에 목록이 있다. 그 목록을 보면, 「오선사 도맥 전수록(五先師道脉傳授錄)」, 「팔정사 연원록(八淨祠淵源錄)」, 「삼찬 연원록(三讚淵源錄)」, 「팔찬 연원록(八讚淵源錄)」, 「제삼 연원록(第三淵源錄)」, 「제오 연원록(第五淵源錄)」, 「제백팔 연원록(第百八淵源錄)」, 「제삼십삼 연원록(第三十三淵源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금강 불교 연원록 서」에 의하면, 김치인의 교통(敎統)은 김용배에게 전해지고 김용배의 교통은 혜봉(惠奉) 이기만(李起滿)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오선사 도맥 전수록」에 의하면 오선사 도맥은 이운섭과 그 두 아들 이용래·이용신, 그리고 김치인과 그 제자 김용배이다.
[남학의 시대적 의의]
19세기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큰 충격과 시련을 겪었다. 이에 대하여 유학자들은 서구 문명의 도전에 대해서는 ‘척사위정(斥邪衛正)’ 운동으로, 일제의 강점에 대해서는 ‘국기 수호(國基守護)’의 결연한 자세로 대처하였다. 유학자들의 조처는 국가의 안위를 위주로 한 것이라 하층 민생의 고달픈 삶과 고통을 돌아보고 어루만져 줄 여력은 미처 없었다. 이때 이운규는 유·불·선 합일 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영산(靈山)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문도를 양성하였다. 그 제자의 하나인 광화 김치인은 시대 상황을 반추하여 유·불·선 삼교를 합일(合一)하여 민생의 삶과 시련을 위무하고 국가의 태평성대를 도모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이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흥 종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하층 민중을 대상으로 한 사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남학의 처사교는 민중의 사상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조명이 필요하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