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에서 백자까지 도자 문화의 메카, 진안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01
한자 靑磁-白磁-陶瓷文化-鎭安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곽장근

[개설]

호남의 지붕인 진안고원은 도요지의 보고이자 도자 문화의 중심지이다. 약 1억 년 전 중생대 마지막 지질 시대인 백악기 때 큰 호수였던 진안고원이 고령토 산지라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중앙부에 자리한 지정학적인 이점으로 줄곧 교통의 중심지라는 사실도 빼 놓을 수 없다. 진안고원에서 도자 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외궁리의 초기 청자는 오월의 첨단 기술 전파로 후백제 때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과 초기 청자 장인 집단의 이주로 침체기를 거쳐 12세기부터 14세기 전반기까지는 공백기로 청자가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 성수면 도통리와 인접된 중길리·백운면 반송리에서 고려 후기 청자가 다시 등장해 계기적인 발전과정을 거쳐 17세기부터 도자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진안고원의 초기 청자를 비롯하여 후기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옹기 등은 천혜의 교역망을 통해 널리 유통됨으로써 마침내 진안고원의 도자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다.

[천혜의 고령토 산지와 교통의 중심지]

백두대간과 금남 정맥, 호남 정맥 사이에 형성된 진안고원은 높이 300m 내외로 전라북도 진안군·장수군·무주군과 충청남도 금산군에 걸쳐 있다. 예로부터 ‘지벽천심 만중창벽(地僻天[山]深 萬重蒼壁)’이라고 해온 말 그대로 높은 산 깊은 물이 수많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마치 수 십 개의 작은 분지들이 집합해 있는 지형을 이룬다.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고원은 도자 문화의 메카이다. 약 1억 년 전 중생대 마지막 지질 시대인 백악기 때 큰 호수였던 진안고원이 고령토 산지라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깊다. 진안고원에서 도요지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진안군이다. 성수면 도통리·외궁리의 초기 청자 요지를 비롯하여 이미 학계에 보고된 진안군의 도요지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금남 호남 정맥이 동서로 횡단하면서 진안군을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유역으로 갈라놓는다. 그리하여 진안 마이산이 고문헌 및 고지도에 금강섬진강의 발원지로 등장한다. 용담댐으로 상징되는 금강 유역은 진안군 북부권으로 진안천·부귀천·주자천·안자천·정자천 등을 따라 협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아직까지 초기 청자 요지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진안군 주천면 일대에 조선 후기의 백자 요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금남 호남 정맥팔공산 북쪽 상추막이골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진안군 남부권을 흐른다. 진안군 마령면에는 섬진강 상류 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진안군 백운면성수면 일대에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성수면 도통리·외궁리 등 초기 청자 요지를 비롯하여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후기 청자와 분청사기가 생산된 성수면 중길리·백운면 반송리 도요지도 자리하고 있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외궁리 초기 청자 요지]

진안고원의 초기 청자 요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륙에 위치한다. 진안고원의 남서쪽에 위치한 내동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진 산자락 북서쪽 기슭 말단부에 도통리 중평 마을이 있다. 마을 북쪽 기슭 말단부에 초기 청자 요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오래전 마을이 조성되면서 상당한 깊이로 흙을 파내어 요지가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본래의 지형이 얼마간 보존된 일부 구역에는 초기 청자 요지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평 마을 일대에서 완·발·접시·U자형 청자, 요도구인 갑발과 갑발 받침, 전축요(塼築窯)의 부재인 벽돌이 수습되었다. 초기 청자의 굽은 선해무리굽과 중국식 해무리굽, 한국식 해무리굽, 변형해무리굽 등이 모두 확인되었다.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색조가 녹갈색 혹은 황갈색 계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국 북방 요장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초기 백자는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요도구인 갑발은 초기 청자 요지에서 발견되는 발형·원통형·복발형이 모두 공존한다. 벽돌이 비교적 넓은 구역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전축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평 마을에서 북쪽으로 350m 떨어진 중성골에도 초기 청자 요지가 있다. 진안군 마령면성수면 경계로 길이 500m 내외의 구역에서 10여 개소의 요지가 확인되었다. 이들 요지는 몇 년 전 임도를 개설하는 과정에 생긴 절단면에 유구가 노출되어 있는데, 요지의 폭은 200㎝ 내외이다. 요도구인 갑발 퇴적층에서 초기 청자와 조질 청자인 녹청자가 함께 수습되었다. 초기 청자의 굽은 선해무리굽과 한국식 해무리굽이 있으며, 후자는 중평 마을 수습품보다 기벽의 두께가 얇고 굽의 접지면도 좁아 약간 퇴화된 속성을 보인다.

외궁리 초기 청자 요지는 도통리 요지에서 남서쪽으로 500m 떨어진 점촌 마을에 있다. 1990년대 초기 청자와 녹청자 계통의 요지로 알려졌으며, 굽 안 바닥에 ‘십[十]’가 표시된 한국식 해무리굽 완도 수집되었다. 요도구인 갑발편은 양이 많지 않지만 비교적 넓게 흩어져 있으며, 기종은 발형과 원통형으로 추정된다. 요도구인 갑발은 북쪽에 인접된 도통리 출토품과 흡사하여 서로 비슷한 시기에 외궁리 초기 청자 요지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초기 청자와 도통리]

한국 초기 청자의 출현 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 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그 견해가 다양하다. 그리고 오월국(吳越國)에서 이주한 공인 집단 및 오월이 송에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도자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되어 기능을 전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초기 청자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가 주도적으로 중국 청자 장인들을 데려와 수도권 일대에서 양호한 입지를 선택하여 요장을 설립하고 초기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 절강성 월주요(越州窯)는 해무리굽과 길이 40m 이상 되는 대형의 전축요로 상징된다. 그리고 초벌구이를 하지 않고 건조된 그릇에 유약을 입혀 한 번만 굽는 단벌구이가 특징이다. 경기도 용인시 서리와 시흥시 방산동,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전축요는 길이 40m, 내벽의 너비 200㎝ 내외로 측면에 출입구와 선해무리굽 완이 상징적인 유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초기 청자 요지에서 밝혀진 유구와 유물의 속성은 대체로 오월 월주요와 긴밀한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대형 전축요의 분포 양상과 그 특징을 근거로 전축요의 축조 기술과 청자의 제작 기술이 중서부에서 남서부로 확산된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여주시 중암리와 서산시 오사리, 대구광역시 진인동, 칠곡군 창평리, 도통리 등은 요지의 길이가 절반으로 축소되었고, 선해무리굽 완과 한국식 해무리굽 완을 생산하다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선남후설(中先南後說)’로 우리나라의 중서부가 남서부보다 전축요가 토축요보다 앞선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남부 지방 중앙부에 위치한 진안고원의 초기 청자 요지는 대형 전축요에서 문양이 없는 초기 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점에서 이곳만의 강한 지역성을 보였다.

[후백제와 오월의 국제 교류 및 청자 기술 전파]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내륙 수로와 해상 교통로가 거미줄처럼 잘 구축된 곳이 새만금 해역이다. 선사 시대부터 천혜의 교통망을 살려 해양 문물 교류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였고, 마한에 이르러서는 패총의 보고이자 해양 문화의 거점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함에 따라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加耶浦) 등 새만금 해역의 거점 포구를 통한 국제 해상 교류도 더욱 활기를 띠었다. 백제의 웅진·사비기 때는 백제의 대내외 관문이자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장보고 선단에 의해 사단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는 새만금 해역을 장악하였던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오월(吳越)과 국제 외교를 가장 왕성하게 펼쳤다. 견훤은 892년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오월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였고, 900년 후백제를 선포한 뒤 오월에 사신을 다시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백제왕의 지위를 인정 받았다. 918년 후백제가 사신과 더불어 말을 오월에 보내자, 927년 오월국 사신인 반상서(班尙書)가 서신을 갖고 후백제를 방문하였다. 후삼국 때 오월과 가장 왕성하게 국제 교류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이다. 그렇다면 후백제의 견훤이 45년 동안 오월과 돈독한 국제 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선진 문물인 월주요의 청자 제작 기술이 후백제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백제 왕성인 전주시 동고산성과 진안고원의 초기 청자 요지의 출토품 사이에 서로 조형적인 유사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방증해 주었다.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와 인접된 진안고원은 도요지의 보고이자 도자 문화의 중심지이다. 진안고원에서 도자 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도통리·외궁리 초기 청자는 오월의 첨단 기술 전파로 후백제 때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선사 시대부터 해양 문물 교류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였던 새만금 해역의 거점 포구로 오월의 청자 제작 기술이 후백제로 유입된 것이다. 오월의 반상서가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를 방문할 때 이용하였던 후백제와 오월의 사행로(使行路)가 우리나라 초기 청자의 전파 경로가 아닌가 싶다.

[중길리·반송리 후기 청자 요지]

도통리 초기 청자 요지에서 북서쪽으로 7㎞가량 떨어진 곳에 중길리 도요지가 있다. 호남 정맥만덕산[762m]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산자락 말단부로 성수면 중길리 사기점 마을에 속한다. 이 마을 입구 남쪽 기슭 밭에 1호 요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50m가량 떨어진 남동쪽 산기슭에 2호 요지가 있다. 달리 점촌 혹은 점터라고 불리는 곳으로, 본래 장인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현재 요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다. 1996년 국립 전주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 조사에서 청자편과 분청사기편, 요도구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청자류는 상감 선·연당초문과 인화여의두문·국화문·육원문 등이 시문된 대접과 접시들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의 퇴락한 청자이다.

진안고원 남동쪽에 위치한 반송리 도요지백운면 반송리 두원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최씨 일가 모친 무덤 옆 경작지에 백자편이 수습된 1호 요지가 있으며, 산골짜기로 100m 떨어진 감나무골에 2호 요지가 있다. 2호 요지에서 고려 말 청자편과 조선 초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수습되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도자기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류는 대접과 접시, 완으로 굽은 투박한 다리굽이며, 문양은 무문을 비롯하여 상감 선·연당초문, 인화 여의두·국화·육원문 등으로 다양하다. 요도구는 자연석 도지미와 경사진 원형 도지미, 절구형과 대형 도지미 등이 수습되었다. 유물은 14세기에서 15세기 초의 퇴락한 청자부터 17세기의 백자까지 시기적인 폭이 넓다.

[진안군 도자 문화의 발전 과정과 손내 옹기]

진안군 도자 문화를 도입기와 침체기, 공백기, 부흥기, 전성기로 나뉜다. 진안고원 도자 문화의 도입기는 진안고원에서 도자 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도통리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시점부터 후백제의 멸망까지이다. 아직은 초기 청자 요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초기 청자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전주 동고산성에서 해무리굽 초기 청자가 출토됐기 때문에 936년 후백제의 멸망 이전에 이미 진안고원의 초기 청자가 생산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 이후 초기 청자를 생산하던 도공 집단이 이동함에 따라 침체기를 거쳐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도요지의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진안고원섬진강 유역에서 12세기부터 14세기 전반까지는 공백기로 비색 청자와 상감청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 건국 초기 강주소가 도통리에 설치된 것은 후백제 초기 청자 요지의 존재와 함께 관할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진안고원 도자 문화의 부흥기로 14세기 후반부터 임진왜란 전후까지이다. 고려의 대몽 항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강진·부안의 청자 문화가 쇠퇴했지만, 진안고원섬진강 유역에서는 청자가 다시 등장한다. 진안고원의 초기 청자 요지와 인접된 중길리·반송리에서 고려 후기 청자가 출현한 것은 도자 생산의 확산에 따른 도공 집단의 이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고원을 떠났던 도공 집단이 선조들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전성기에는 진안군의 도요지 수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이 무렵 진안고원금강 유역에 속한 진안군 주천면 일대가 새로운 도자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진안고원에서 생산된 조선 후기의 백자가 천혜의 내륙 교역망을 이용하여 널리 유통됨으로써 진안고원의 도자 문화가 다시 융성하였다. 현재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손내 옹기도 옛날 화려했던 진안고원 도자 문화의 전통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진안군 도자 문화에 관심과 지원]

우리나라에서 초기 청자 요지는 역사성을 인정 받아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도통리·외궁리의 초기 청자 요지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관리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고 있다. 진안고원 초기 청자의 역사성과 함께 진안고원을 무대로 찬란히 꽃피웠던 도자 문화를 규명하기 위한 학계의 많은 관심이 절실하다. 동시에 진안고원 내 초기 청자 요지에 대한 학술 발굴을 실시한 다음 전주시 동고산성과 남원시 실상사 등 다른 유적의 출토품과 비교 분석을 통한 초기 청자의 등장 배경과 운영 주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행히 진안고원에는 ‘역사의 실체’로까지 평가 받고 있는 100여 개소의 도요지가 잘 남아 있기 때문에 학계의 관심과 행정 당국의 보존 대책도 조속히 마련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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