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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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堤鄕校 |
영어음역 | Gimje Hyanggy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39[향교길 89-3]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용엽 |
성격 | 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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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404년(태종 4)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3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39[향교길 89-3] |
소유자 | 전라북도 향교재단 |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 |
문화재 지정일 | 1971년 12월 2일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에 있는 조선 전기 향교.
[개설]
향교의 설립 목적은 성현에 대한 향사와 유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침에 있으며 아울러 지방 문화 향상 및 사기 진작 등 사회교육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태조는 지방 재정에 의해 설치된 지방 향교의 흥패(興敗)를 수령들의 치적 평가 척도로 삼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향교 보급에 중점을 두었다.
이후 향교는 조선 중엽까지 성황을 이루었으나, 병란과 흉년 및 서원의 속출로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 조선 후기에는 한 고을에 1개씩만 두고 정리하였다. 향교의 감독 책임은 감사에게 있었고 중앙 정부는 향교 보호 육성을 위해 제독관을 8도에 두는 등 지방 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한일병합 이후에는 향교도 제 기능을 못 하고 최근에는 서고에 있는 자료를 열람하는 연구자들의 도서관 기능을 하고 있다.
[위치]
김제향교(金堤鄕校)는 김제시 교동 39번지[향교길 89-3]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김제향교 대성전은 1404년(태종 4)에 창건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탔으며 그 후 1635년(인조 13)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고쳐지었다. 이외에 명륜당·만화루·동무·서무·동재·서재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며,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형태]
대성전 앞면에 사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과 옆이 트인 툇간을 두었고 몸채 쪽에는 문을 달았다. 중앙 칸의 가운데에 2짝의 문을 달고 양쪽 기둥에는 골판벽을 끼웠다. 양 끝 칸에는 1짝씩 문을 달고 그 옆 공간에도 골판벽을 끼워 특이한 앞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양쪽 끝에 있는 기둥에는 건물 옆면 쪽으로 지겟다리 모양의 굽은 버팀목을 기둥 중간에 박았는데, 그 형태가 장수향교(長水鄕校)의 대성전[보물 제272호]과 같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다.
공포(拱包)는 주심포계와 같이 전면에서 창방(昌枋)을 걸치고 기둥 위에서만 짰는데, 포작(包作) 자체는 다포계(多包系)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초석은 자연석과 약간 다듬은 돌을 혼용하였다 기단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네 단으로 축조하였다.
[현황]
처음에는 대성전에 공자를 중앙으로, 좌우에 4성10철(四聖十哲)과 송조(宋朝) 6현(六賢)을 배향하고, 동·서 양무에는 한국의 18현을 배향하였으나, 1949년 6월 성균관(成均館) 결의에 의해서 10철 4현의 위패를 철수하였다. 지금은 이 고장 유림 송기면(宋基冕)·김창배(金昌培) 등의 건의로 5성 4현과 한국 18현을 배향하고 있다. 김제향교는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고, 전라북도 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현재는 일요학교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문과 서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제향교는 규모는 작지만, 성균관의 규모를 모방하였고 현 건물의 건립 연대가 400여 년에 가까운 문화재로 건축 양식이나 향교의 전통을 잘 보존하여 관광 자원으로 지역 문화 발전에 활용되도록 연구가 요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