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27 |
---|---|
한자 | 國債報償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우용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1907년 자발적 모금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려 한 운동.
[개설]
국채보상운동 은 1907~1908년 간 국민의 자발적 모금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려 한 운동으로 현재의 강남구 지역인 광주군 대왕면 주민들도 이 운동에 호응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이후 적극적인 차관 공여를 통해 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그를 기반으로 식민지화를 마무리하려 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재정 고문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해관세와 국고금을 담보로 한 이 차관으로 인해 대한제국 정부는 재정 자립성을 상실하였고, 정부와 관련을 맺고 있던 민간 자본의 활동도 극도로 억압되었다.
[경과]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으로 돈을 아껴 나라 빚을 갚자고 제창하였다. 이 제안이 당시 각종 신문을 통해 전해지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금주, 금연과 의연금 납부에 동참하였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 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으며, 서점·약국·대한매일신보사·잡지사 등을 수전소(收錢所)로 지정하였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을 목표로 한 20여 개의 단체가 창립되었다.
현재의 강남구 지역에 속하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송현동에서는 1907년 4월, 주민 48명이 모금한 8원 20전을 황성신문 수전소에 송부하였다. 대왕면 송현동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성금을 낸 사람의 명단과 액수는 아래와 같다.·
원용섭(元容燮)·노선근(盧先根)·민견교(閔見交) 각 50전, 민영귀(閔泳龜)·염홍암(廉弘巖) 각 30전, 김재손(金再孫)·노덕인(盧德仁)·방부성(旁富成)·이만봉(李晩奉)·우태순(禹泰順)·송천순(宋千順)·이영삼(李永三)·이팔복(李八福)·민영학(閔泳學)·민두식(閔斗植)·민문호(閔文鎬)·민영규(閔泳圭)·민영완(閔泳完)·민영팔(閔泳八) 각 20전, 민진천(閔晉天)·정태규(鄭泰奎) 각 15전, 장정학(張正學)·송춘성(宋春成)·민황룡(閔黃龍)·이삼용(李三用)·김원홍(金元弘)·방윤식(旁允植)·민평옥(閔平玉)·방동학(旁同學)·민영태(閔泳泰)·이영훈(李永勳)·민준식(閔俊植)·이득쇠(李得釗)·민영권(閔泳權)·민우식(閔于植)·이주응(李周應)·이수응(李壽應) 각 10전, 방원성(旁元成)·민상지(閔相智)·민충습(閔忠習) 각 20전, 박동한(朴東漢)·민영기(閔泳其)·이춘근(李春根)·이금성(李今星)·민원필(閔元必)·이병기(李秉夔)·이의만(李宜晩)·민영무(閔泳武)가 10전씩을 내었다.
[결과]
국채보상운동 이 1907년 내내 전국적으로 많은 호응을 받으며 활발히 전개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대구에서 일어난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였는데,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하였다고 무고하였다. 베델은 추방당하고 양기탁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운동 지도부에 신뢰를 잃은 대중의 참여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의의와 평가]
강남구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는 전모를 알 수 없으나 작은 마을에 불과한 광주군 대왕면 송현동의 참여 사례를 통해 이 운동이 얼마나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