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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각희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062
한자 大邱角戱大會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행사/행사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성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작 시기/일시 1922년 5월연표보기 - 대구각희대회 개최

[정의]

1922년 5월 대구광역시에서 개최되었던 체육대회.

[개설]

대구각희대회(大邱角戱大會)는 1922년 5월 대구토목공려회가 주최로 개최되었다.

[연원 및 개최 경위]

씨름이 본격적으로 스포츠의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각저, 각희, 각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따라서 대구각희대회 역시 씨름대회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각희 경기를 관람하던 사람들이 선수의 생명이 위험할까 두렵다며 중지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씨름보다는 격투기에 가까웠다고 추정된다.

[행사 내용]

대구각희대회는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탄압이 느슨해진 1922년 개최되었다. 군중들이 모여야만 진행될 수 있었던 장터 스포츠를 일본 경찰이 반가워할 리 없었던 터라 대회를 주최한 대구토목공려회 회장 박기돈은 일본 경찰에 매달리다시피 애원하여 대구경찰서 앞길의 대화정에서 겨우 대구각희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5월 4일 결승에 나갈 장사들을 선발하여 5월 10일 결승전이 열렸다. 경상북도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장사들이 모여 경기장 일대 주막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량급 대회에서는 대구의 김방우가 1등하여 당목 한 필을 받았고, 중량급에서는 고령의 곽숙제가 1등을 차지하여 농우 한 마리와 이승 한 필을 받았다.

[현황]

대구각희대회는 외국에서 유입된 야구와 축구 같은 근대 스포츠가 유행하던 때 우리 고유의 씨름을 지금까지 지켜 올 수 있었던 대회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낙동강은 고운 모래가 많아 자연스럽게 씨름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말릴 만큼 다소 과격한 스포츠였던 각희는 일본 경찰의 감시가 그나마 덜하고 많은 인파가 몰리지 않는 지방에서 장사들의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며 점차 씨름으로 발전하였다. 대구각희대회 이후 신의주나 합천 등지에서 잇따라 씨름경기가 열리면서 씨름이 정기 대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구각희대회는 현재 사라지고 씨름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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