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육 선생과 돈적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749
한자 -晩六先生-遁蹟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집필자 김월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2010년 1월 30일 - 「만육 선생과 돈적소」 채록
관련 지명 돈적소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관련 지명 팔공산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지도보기
채록지 신암리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지도보기
성격 인물담
주요 등장 인물 최양
모티프 유형 충절|지명 유래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에 전해오는 만육 최양에 관한 인물 이야기.

[개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에서 전해오는 「만육 선생과 돈적소」는 조정에 나와서 벼슬하라는 이성계의 요청을 거부하고 팔공산 돈적소에서 은둔하며 고려 유신으로서의 충절을 지킨 최양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성계를 부정적으로 그려낸 이성계 설화에 포함된다.

[채록/수집 상황]

「만육 선생과 돈적소」는 한국학 중앙 연구원 어문 생활 연구소와 안동 대학교 민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 개정·증보 사업’ 전북 조사팀에서 2010년 1월 30일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최만근[남, 77]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지원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웹서비스에 「만육 최양 선생이 운둔했던 만적소」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조사 자료 텍스트와 연동되는 디지털 음원을 들을 수 있다.

[내용]

만육 최양은 고려 시대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와 동문수학한 벗이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우고 실권을 잡은 후 만육에게 조정에 나와서 벼슬하기를 요청하였으나 만육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조정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에 걸쳐 있는 팔공산돈적소’라는 석굴에서 은둔했다. 이곳은 원래 절터였는데 만육은 이곳의 한 스님이 공급해주는 식량으로 살았다고 한다. ‘돈적소’는 만육이 돼지처럼 살았던 굴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만육이 3년간 돈적소에서 은둔했는데 나라에서는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만육 선생과 돈적소」의 주요 모티프는 ‘만육 최양의 충절’과 ‘은둔과 관련된 지명’이다. 이 전설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인정하지 않고 고려 신하로서 충절을 지키기 위해 72명의 선비가 두문동에 들어가 평생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설화와 같은 맥락에서 전승된다. 고려 유신들의 충절을 상징하는 공간인 ‘두문동’은 ‘돈적소’라는 현실의 지명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는 ‘돈적소’라는 지명의 유래를 만육 최양의 은둔과 관련지어 밝히는 지명 유래담 성격도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