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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798
한자 晩六崔瀁先生遺墟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360-2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유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351년 - 최양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424년 - 최양 사망
건립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만육최양선생유허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92년 6월 20일연표보기 - 만육최양선생유허비 전라북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만육최양선생유허비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만육최양선생유허비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360-2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최양(崔瀁)
재질 오석
크기(높이,너비,두께) 148㎝[높이]|60㎝[너비]|24㎝[두께]
소유자 최영권
관리자 최영진 외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에 있는 최양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한 비.

[개설]

1871년(고종 8)에 최양(崔瀁)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비이다.

[건립 경위]

최양(崔瀁)[1351~1424]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은둔하였던 고려 말의 충신으로 유명한 이른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정몽주의 조카이기도 하였던 최양은 1380년(고려 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4부의 상서(尙書)와 대제학 등 고위 관직을 지냈으나 조선 건국 후 출사(出仕)하지 않고 은둔하였으며, 정몽주가 살해된 후에는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에서 잠시 머물다가 팔공산으로 들어가 3년간 은거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최양의 후손들이 최양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위치]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시냇가 절벽 위에 있는 구남각 안에 있다. 구남각은 진안 로터리에서 좌측 방향으로 이동한 뒤 진무로를 따라 5㎞ 이동해 은천 삼거리에서 송리, 백운 방면으로 좌회전하고 평가로, 임진로, 백장로를 따라 가면 갈 수 있다.

[형태]

거북 좌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오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148㎝, 너비 60㎝, 두께 24㎝이다.

[금석문]

비표(碑表)에는 ‘충익공 만육 최 선생 양 둔적 유허비(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음(碑陰)은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이 지었는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육 최공은 우리 성조(聖祖)[태조 이성계]와는 엄자릉(嚴子陵)과 같은 우의(友誼)가 있었다. 행궁(幸宮)에 한번 입궐하니 세상에서는 어좌(御座)를 범한 객성(客星)에 비겼다. 그러나 공의 망복(罔僕)[신하가 되지 않음]한 절의는 엄자릉의 그 일을 높이 추켜세우려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상론자(尙論者)는 혹 이르기를 '백이(伯夷)와 엄광(嚴光)을 합쳐서 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곳은 그분이 자취를 숨기고 살던 곳이니, 권근(權近)의 지문(誌文)에서 칭한 바 중대산(中臺山)이 바로 이곳이다. 뒤에는 봉강(鳳崗)의 묘소 아래로 옮겨와 살다가 생을 마쳤다. 중대산은 결코 평평해질 수 없으니 선생의 풍도(風度) 또한 산과 더불어 그 수명을 같이 할텐데 비는 무엇하러 세울까? 비를 세운 것은 자손이 사사로이 한 것이고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최씨의 두 수재(秀才)인 봉익(鳳翊)과 종대(鍾大)이다. 명하기를,

고려 말엽에 들어와 숨었다니,

임신년 이전이던가,

사직이 망한 지 얼마 후이라네.

와해(瓦解)한 후일의 봉강(鳳崗)은

이곳에서 이사하여 살았던 곳이라오.

보록(寶籙) 33년 갑진(甲辰)(세종 6)에 고종(考終)하여,

성상의 신미년(辛未年) 봄에 비를 세우니,

아! 전후로 5백 년에서 20년이 모자라는구려.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이 찬(撰)하다.”

[현황]

유허비는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유허비는 현재 홍살로 둘러싼 구남각 안에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 비각의 밖에는 한글로 된 안내판을 세워 놓아서 관람객이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만육최양선생유허비는 고려 말 조선 초 왕조 교체기에 충절을 지켰던 최양의 자취를 진안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그 활용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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