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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참판이공 정려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914
한자 證參判李公旌閭記
영어음역 Jeungchampan Leegong Jeongnyeogi
영어의미역 The Chronicle of Memorial Shrine for Lee Chanjo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순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문(記文)
작가 권철(權徹)
창작연도/발표연도 1696년(숙종 22)연표보기

[정의]

1696년(숙종 22) 권철이 남한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찬조에게 정려가 내려지자 지은 정려기.

[개설]

「증참판이공 정려기(證參判李公 旌閭記)」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찬조(李纘祖)에게 정려의 은전이 내려지자, 손자인 이한섬(李漢暹)이 권철(權徹)에게 간청하여 지은 정려기(旌閭記)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정문동)에 있는 이찬조 정려각 안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내용]

이찬조의 충정을 널리 표양(表揚)하기 위한 칭송의 글로, 이찬조의 가계와 남한산성 전투의 간략한 전말, 정려의 은전이 내려지기까지의 경위 등을 서술하였다.

"오호라! 이것은 고(故) 충신 증참판(贈參判) 이공(李公)의 정려이다. 마을에 정표를 세움은 공이 충절로 죽은 것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 인조 때 공은 힘이 센 것으로 인하여 선전관에 천거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병자호란을 만났다. 공은 왕명을 받들어 선지(宣旨)를 충청도절도사에게 전하고 돌아오다가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적탄이 비오듯하여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므로 할 수 없이 칼날을 무릅쓰고 주먹을 휘둘러 몇 사람의 적을 쳐서 죽이고, 적병에게 잡히게 되었지만 적병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적병은 화를 내어 공을 묶어 숯불 위에 놓으니 결국 타죽고 말았다.……

병자년이 다시 돌아옴에 충절이 더욱 빛나 정표의 은전이 백 년 뒤에 내려져, 후세에 이 정려를 지나는 자로 하여금 감탄하고 경건히 하여 모두 충신 증참판이공의 정려인 줄 알아 강화도에서 충절을 세운 현사(賢士)와 심양에서 의(義)에 항거한 열사로 더불어 칭송하게 되면, 그 풍속의 기강을 세우고 세상의 교회를 유지시키는 도리에는 다행한 일일 것이다. 공의 손자인 진사 한섬(漢暹)이 이 일을 주간하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드디어 기문을 쓰고 그 운(韻)에 따라 시를 지어 돌려보낸다.……"

[의의와 평가]

「증참판이공 정려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찬조의 활약상과 충정뿐만 아니라, 당대 용인 지역의 전황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 인조 때의 여항시인 윤홍찬(尹弘璨)이 지은 「용인도중」과 함께 ‘병자호란과 용인’을 논의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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