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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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奎瑞 |
영어음역 | Choe Gyuseo |
이칭/별칭 | 문숙,간재,소릉,파릉,충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장리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최규서(崔奎瑞)[1650~1735]는 경기도 광주시 출신으로 숙종대에 관직에 나아간 이후 경종대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당쟁이 격화된 당시 소론의 영수로 활동하였다. 영조 즉위 후 낙향한 80세의 몸으로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대한 대책을 올려 공신에 녹훈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시호는 충정(忠貞). 아버지는 사정(寺正) 최석영(崔碩英)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김자남(金自南)의 딸이다. 다섯 살 때 중부(仲父)인 현감 최석유(崔碩儒)의 후사로 들어갔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혜(李蕙)의 딸이다.
[활동사항]
남구만(南九萬)에게서 수학한 최규서는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81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684년에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1685년 지평에 올랐고, 정언이 되었을 때 임금의 하교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1686년 홍문관에 뽑혔으며, 이조좌랑·수찬 등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서인이 노소로 갈릴 때, 소론(少論)에 가담하여 나양좌(羅良佐)를 옹호하였다. 사간·호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88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상피로 사직하였다.
1689년 대사간이 되었을 때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왕비책봉에 반대하였다. 1694년 형조참의·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697년 이조참판·예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698년에 형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는 한성판윤·대사헌·양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701년 우참찬이 되었으며, 1702년(숙종 28)에는 한성판윤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후 30년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723년(경종 3)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도성으로 달려가 변고를 알리고 역적 토벌의 글을 올려 어필을 하사받았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필사본 『간재집(艮齋集)』과 『간재만록(艮齋漫錄)』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에 있었으나 후손들이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곡리 산 45번지에 있는 최만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인좌의 난을 적극 토벌한 공으로 영조에게서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필을 하사받았으며,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