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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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樂任 |
영어공식명칭 | Kim Nak-im |
이칭/별칭 | 사일(士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 김낙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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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김낙임 군자금 모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김낙임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14년 - 김낙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김낙임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낙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낙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
거주|이주지 | 김낙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
활동지 | 김낙임 활동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김낙임(金樂任)[1881~1914]은 의병장 이강년(李康年)[1858~1908]을 찾아가 종군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병약하여 거부당하였다. 이후 순흥 일원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김낙임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사일(士一)이다. 아버지는 이강년 의진의 소모장을 지낸 김영시(金永詩)로 1881년(고종 18) 3월 8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낙임은 아버지 김영시의 영향으로 1907년 이강년을 찾아가 종군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이강년의 의병일기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에는 이때 상황을 “정사 11월 4일 순흥인 김낙임(金樂任)이 와서 뵈었다. 김낙임은 왕년 순흥의진의 소모장 김영시의 아들이다. 신체가 매우 영약하고, 또 독자이므로 종군하기 적합지 않은 고로 위유(慰諭)하여 보냈다”라고 묘사해 놓았다. 이강년은 김낙임의 절의를 높게 평가하였으나, 김낙임의 몸이 병약한 데다가 독자인 것을 감안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타일러 되돌려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일로 종군할 것을 단념하였으나 나름대로 의병운동에 일익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여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게 된다. 1910년 8월 7일 순흥군 화천면 본리(本里)[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에 거주하는 박세현(朴世鉉)을 찾아가 30원을 모금하였고, 8월 8일에는 본리의 서상옥(徐相鈺)을 찾아가 30원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적에게 적발되어 헌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913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공갈죄로 징역 3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낙임은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