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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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德鄰 |
영어공식명칭 | Cho Deokrin |
이칭/별칭 | 택인(宅仁),옥천(玉川),창주(滄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조덕린(趙德鄰)[1658~1737]은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1691년(숙종 17) 문과에 급제하였다.
[가계]
조덕린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전(趙佺), 할아버지는 조정형(趙廷珩),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조군(趙頵), 어머니는 류세장(柳世長)의 딸 풍산류씨(豊山柳氏)이며, 부인은 김응조(金應祖)의 외손인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수하(權壽夏)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덕린은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의 속현(屬縣)이었던 영양현(英陽縣)에서 태어났으며, 영해 출신의 학자 이현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77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169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제원역 승·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1708년 강원도 도사로 재직하다 파직되어 안동 소라동 옥천산 아래에 복거하였다. 1711년 황해도 도사, 1716년 충청도 도사를 지냈으며, 1725년(영조 1)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해 10월 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노론·소론 간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 조의 소를 올렸다. 그러나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판(仕版)에서 삭적되고, 종성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은(謝恩) 후 바로 사직하였다. 이후 수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상도 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가 되어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다.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지냈다. 이후 안동 소라동(召羅洞)에 면가헌(眄柯軒)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1736년 서원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는데, 1725년에 올린 10조소와 연관되어 다시 노론의 탄핵을 받고 국문을 당하였다. 1737년 김성탁이 이현일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엄히 국문을 당하고, 이때 다시 1725년 상소의 일이 논의되면서 제주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로 향하던 중 강진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898년(광무 2) 『옥천문집(玉川文集)』을 간행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오적촌(烏赤村)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