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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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楊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집필자 | 전민욱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양효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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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양효지 사망 |
본관 | 청주 양씨 - 충청북도 청주시 |
입향지 | 입향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효지마을 |
세거|집성지 |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선천리 |
세거|집성지 |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
세거|집성지 |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
성씨 시조 | 양기(楊起) |
입향 시조 | 양효지(楊孝智) |
[정의]
양기(楊起)를 시조로 하고 양효지(楊孝智)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청주 양씨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시조는 양기이다. 양기는 중국에서 태어나 원나라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위가 삼태(三台)에 이르렀으며, 1351년(충정왕 3)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같이 노빈도령(魯嬪都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체찰사(軆察使) 노국삼명사신(魯國三命使臣)으로 고려로 들어왔다.
양기는 홍무 말년(洪武末年)에 다시 중국에 들어가 계책을 펴서 말하기를 “동국이 궁벽한 바닷가에 있어 읍(邑)들도 극히 적고 백성들이 피폐에 지쳐있어 세공(歲貢)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상달하여 비로소 각종 세공(歲貢)이 감면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가 부하게 되고 백성이 안락하여 마침내 태평함을 얻게 되자 나라에서는 공을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상당백(上黨伯)에 봉하고 해주(海州)와 송화(松禾)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자 다시 청백리(淸白吏)를 봉하였다.
사후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고 호를 암곡(巖谷)이라 하고 진상(眞像)을 송화(松禾) 묵산(墨山) 수증사(修證寺)에 모셨으며, 묘소는 백천군(白川郡) 유곡면(柳谷面) 영성리(永成里) 지동(池洞)에 있다.
[입향 경위]
청주 양씨의 영천 입향조는 시조공인 양기의 현손인 양효지(楊孝智)이다. 양효지의 종숙(從叔)되는 양배(楊培)의 묘소와 효자각[양배 효자각]이 영천에 남아 있고 영천에 살았던 것은 확실하나, 그의 아들이 울산으로 가고 또한 후손들이 경주 등에 거주하는 등 영천에 세거를 하지 않기에 입향조로 보기는 어렵다.
양기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 영천군 화산면 화산리 효지(孝智)[효지미] 마을이다.
그가 도성을 떠나 은거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선왕 즉 세종의 유언을 들어 세종의 빈이었던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옥새(玉璽)를 내놓지 않겠고 버티다 참화를 입자 혜빈과 사촌간이며 더구나 지조 있고 절개가 굳은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통성을 잃은 왕조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처음 은거한 곳은 고향이었으나, 수년 후 영천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효지마을로 은거한 연유는 불확실하다. 다만 그의 종숙(從叔)인 양배(楊培)가 이미 이곳에 터를 잡고 있은 데서 그 연유를 찾고자 했으나 그도 어려웠다. 양배 또한 어떤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양배의 처남이 경주 김씨로 처음 영천에 입향한 호연당(浩然堂) 김자양(金自養)이기에 관련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황]
입향 이후 인물을 향지 『영양지(永陽誌)』와 『화산지(花山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두 향지에 실린 청주 양씨는 입향조 양효지를 비롯하여 관찰사(觀察使) 양배, 증(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양자한(楊自漢), 가선대부(嘉善大夫) 양희련(楊希漣),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양사(楊泗), 가선대부(嘉善大夫) 양수(楊洙), 문장이 세상에 드러난 양경사(楊景泗)와 양명화(楊命和), 양대민(楊大民) 등이 있다.
청주 양씨의 집성촌은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읍 일원[현재 대구광역시 북구에 편입됨], 경주시 내남면 일원, 경주시 강동면 일원,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일원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영천의 화남면 선천리 및 귀호리, 화북면 자천리도 큰 집성촌 중의 하나이며, 모두 입향조인 정간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입향조를 제향하는 덕강서원(德岡書院) 및 정간공양곡양선생신도비(靖簡公良谷楊先生神道碑) 및 동래진병마사 양배(陽培) 효자각과 양실근 정효각(陽實根旌孝閣) 등이다. 그리고 선대 묘소를 수호하는 묘재로 모산재(慕山齋)·광풍재(光風齋)·양청재(養淸齋)·첨모재(瞻慕齋)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