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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951
한자 梁達泗
이칭/별칭 도원(道源)|남암(南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곽아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8년연표보기 - 양달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37년 - 양달사 무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6년 - 양달사 진해 현감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553년 - 양달사 남해 현감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양달사 의병 일으킴
몰년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양달사 사망
성격 무인|의병장
성별
본관 제주
대표 관직 진해 현감

[정의]

조선 전기 영암 출신의 무신·의병장.

[개설]

양달사(梁達泗)[1518~1555]는 시묘살이 중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도원(道源), 호는 남암(南岩)이다. 감역(監役) 양흥효(梁興孝)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주부(主簿) 양승조(梁承祖)이다. 문인 양팽손(梁彭孫)[1488~1545]이 아버지의 팔촌 형제이다.

[활동 사항]

양달사는 1537년(중종 32)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전라 좌우 우후(全羅左右虞侯)와 진해 현감(鎭海縣監)을 역임했다. 1553년(명종 8)에 남해 현감으로 부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았다. 젊은이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연회를 벌여 왜군들이 참관하는 사이에 의병과 관군이 함께 공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전열을 가다듬고 재차 공격해 오는 왜군을 진흙땅으로 유도하여 다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상을 당한 사람이 전쟁에 나간 것을 부끄러워하여 공을 관군에 돌리고 돌아와 시묘살이를 계속하다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도내 유생들이 수차례 양달사가 표창을 받을 수 있도록 나라에 상신해 선조(宣祖) 때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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