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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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生竹島記 |
영어음역 | Jangsaengjukdogi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승진 |
성격 | 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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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안용복(安龍福) |
저자 | 야다 다카마사[矢田高當] |
저술연도/일시 | 1801년(순조 1) |
[정의]
1801년(순조 1) 야다 다카마사가 저술한 안용복의 이야기가 실린 일본 문헌.
[개설]
울릉도를 오가며 어업 행위를 하는 어부들의 이야기와 안용복(安龍福)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다.
[구성/내용]
○ 독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키도오고로부터 송도는 서쪽으로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2박 2일 가야 되며, 도법 36정 1리[약 3.3㎞]로서 해상의 행정은 170리[약 66㎞] 정도로 생각된다. 산이 낮고 험한 형태를 띠었다 하며 토지의 리수는 5리~3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 안용복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국인(異國人)을 모아 술을 대접하고 만취한 틈을 타 안용복과 박어둔(朴於屯)을 연행했으나, 이것을 눈치 챈 한 패들이 쫓아와 대포를 서로 쏘는 등 흡사 전쟁을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생략)… “거듭 말하거니와, 이 죽도는 오오야·무라카와 가(家)에서 일본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섬이기 때문에, 양해도 없이 해마다 도해하는 것은 안 된다.” 본선에 돌아오자 자기편을 얻은 오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선장이 강하게 나왔다.
“응, 그러냐! 왜놈은 이 섬을 죽도라 하나 우리들은 울릉도라고 불러 오고 있고, 조선 영토로 알고 있다. 이 섬은 신라시대에 우산국이라 불렀으며, 신라에 항복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는 바뀌었어도 태고 때부터 버젓한 우리 국토다. 지금은 울진현에 속하고 있는 이 섬을 너희들이 점거한다는 것은 이웃 나라와의 친분을 없애는 해적 행위다.”
“아무튼 우리나라 장군님의 위세를 겁내지 않는 큰소리이다. 저 선박의 표지를 보나, 장군으로부터 배수한 물건을 보나, 이 섬은 우리들이 장군으로부터 배령한 것, 이것을 잘 보고 난 뒤 말하라.”
선장 헤이베[平兵衛]는 몸에 늘 지니고 있는 상어 가죽 통을 품속에서 꺼내고는 정중하게 절하고 나서, 무엇인지 서류 같은 것을 끄집어내 보였으나, 안용복은 외면하고 보지도 않은 채 물러서지 않았다.
“자고로 이 울릉도는, 산해진미가 풍요로운 섬이지만, 우리 본토로부터는 멀고 거친 바다 속의 외딴섬이기 때문에, 그것을 약점으로 왜의 해적들이 휩쓰는 곳이 되고, 우리 조정에서는 여기에 백성을 이주시키면, 끌고 가서 노비, 첩 따위로 팔아 버리는 등, 무도한 짓을 당해 왔기 때문에, 태종 때부터 섬을 비워 두었던 것이다.
왜구의 못된 짓은 물론,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약취하고 침략했을 때, 이 섬에 숨어 있던 우리 본토의 유민을 위협함으로 군선(軍船)을 보낸 일도 있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이 섬을 비워 두고는 있었으나, 앞으로는 어떤 수탈 행위도 그냥 두지 않겠다. 오랫동안 약탈을 일삼아 온 왜놈이야말로 사과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말을 함부로 하는 이 난폭한 놈!”… [생략] …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었으나 21명의 선원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안용복과 박어둔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논쟁하면서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