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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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의미역 | Justice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은지 |
[정의]
외침을 물리치기 위해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조직되어 활동했던 민병.
[개설]
의병은 국가가 외침으로 인해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민병을 말한다. 유사 이래 외침을 많이 당했던 우리나라의 경우 의병의 역사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의병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및 구한말의 의병이었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의병 활동을 구한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노성궐리사 유회]
궐리사(闕里祠)에서 ‘궐리’는 공자가 태어나서 살던 중국 산뚱성 곡부(曲阜)의 궐리촌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따라서 궐리사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한국에는 현재 충청남도 논산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진주 및 경기도 오산에만 남아 있다. 1903년 4월 최익현은 충청남도 논산의 노성 궐리사에서 유회(儒會), 즉 유생들의 집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의 조직을 호소하였으며 영남의 정재규·호남의 기우만 등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후 최익현은 1905년 12월에 다시 노성 궐리사 유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유회를 바탕으로 하여 1906년 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의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
[1907년의 의병활동]
충청남도 논산에서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는 1907년 정미의병 이후부터이다. 1907년 9월 26일 논산에는 연산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의병 150여 명이 연산의 계룡산 백암리(현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백암동)에서 일본군 연산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에 일제는 같은 해 10월 9일 일본군 제14헌병대를 한국 주차 헌병대로 개편하여 강경에 분대를 설치함과 더불어 여산, 은진 등지에 분파소를 설치하고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생긴 분파소는 의병들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4일 논산의병 24명이 여산분파소 및 군청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다음날인 5일에도 의병 70여 명이 은진분파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냈으며 같은 달 27일에는 은진의 하두면 종평에서 의병군이 일본 경찰대를 포위 공격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12월 25일에는 의병 100여 명이 은진의 동쪽에서 일본군대와 전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8년 1월 8일까지 계속하였으며 의병의 숫자는 15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의병 부대는 연산의 인천장시에 일시 주둔하다가 구자곡면 마산평으로 근거지를 옮겨 같은 달 19일 오후 1시경에 일제가 파견한 순사 3명, 강경수비병 4명, 기병 4명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1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의병군은 고산 쪽으로 퇴각하였다.
[1908년의 의병활동]
1908년 1월 26일~28일 의병 70여 명이 노성의 상도면에서 일본 경찰을 상대로 총격전을 전개하였으며 30일에도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 의병 김인규가 체포되었다. 또한 2월 17일~18일에도 노성의 외성면과 연산의 대리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으며 3월 6일에도 의병 40여 명이 연산의 오산리에서 일본군 전주기병토벌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의병 23명이 전사하였다. 전사한 의병 23명에는 연산의 의병장 노송암부대의 부장 주경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뒤 노송암부대의 의병장도 결국 체포되었다.
3월 15일에는 의병 40여 명이 강경의 한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24명이 전사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 20여 명은 은진의 갈마면에 집결한 후 4월 6일에는 연산의 만목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4월 8일에도 연산의 벌곡면 조령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4월 10일에도 연산의 고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4월 29일에는 이원백 부대가 연산 동대곡면에서, 5월 29일에는 이충원 부대 27명이 연산의 고난사에서 일본군과 각각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의병 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은 강경에 있던 수비대를 총동원하여 1908년 6월 18일부터 25일까지 논산과 인근 지역을 포함하는 대대적인 의병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선 논산 지역의 의병들도 거세게 저항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후 잠시 진정국면으로 들어선 논산 지역의 의병 활동은 1908년 말부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중심으로 다시 전개되었다.
[1909년 이후의 의병활동]
1908년 말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군자금 모집 활동은 1909년에도 이어졌다. 1909년 1월 4일에는 강경의병 14명이 석성 삼산면의 나흥춘의 집에서, 1월 19일에는 한산 동상면의 박영수의 집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일에는 연산 웅치의 상인 박춘옥 등 2명의 집을, 같은 달 7일에는 의병 7명이 은진 성본면 등리의 김성학의 집을 각각 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09년 1월 31일에는 논산의병 10여 명이 연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12일에도 논산의병 약 20명이 용안에서 강경경찰서 순사들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활발하게 전개되던 논산 지역의 의병 활동은 1911년 2월 4일 의병 관선봉·고선봉·황쌍학 등이 강경에서 체포 되면서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논산 지역에는 이러한 의병 활동 외에도 순절을 통하여 구국의 의지를 표명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연산의 이학순과 두마의 김지수가 한일합병을 축하하는 의미로 일제가 준 은사금을 더러운 돈이라고 거절하고 자결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