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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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沼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태현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강소불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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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강소불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
출생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거주|이주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활동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강소불(姜沼拂)[?~?]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3일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의 만세 시위가 확산되어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등 남양주 지역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1919년 남양주 지역에서 3·1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화도면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월산교회 교인 이인하(李麟夏)·이택주(李澤周)·김우동(金愚東)·김필규(金弼圭)와 화도면 월산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마을 주민 이달용(李達鎔)·이승보(李承輔)·이재하(李載夏)·이덕재(李德在)·이택하(李澤夏)·유인명(柳寅明)·홍순철(洪淳哲)·윤태익(尹泰益) 등이 거사를 모의하였다. 하지만 1919년 3월 16일 일본 경찰에 의하여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승보·이재하·이택하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이승보·이재하·이택하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하여 모인 마을 주민들은 1919년 3월 18일 밤 10시경 수십 명의 군중이 화도면 마석모루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점차 수가 늘어나서 200명이 되었다. 그러자 강소불도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에 있는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분위기가 과열되자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서의 3·1운동 중 최초의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때 김필규와 강선원(姜善遠)·권은(權慇)·남궁우룡(南宮又龍)은 체포되었고, 일본 헌병대의 총격에 의하여 이달용과 손복산(孫福山)·신영희(申榮熙)·유상규(兪相奎)·이교직(李敎稙) 등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하였는데, 강소불도 중상을 입으면서 시위대와 함께 해산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