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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균 효행문서 및 정려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97
한자 鄭龍均孝行文書-旌閭碑
영어음역 Jinju Daepyeong Jeong Yonggyun Hyohaeng Munseo Mit Jeongnyeobi
영어의미역 Record and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Jeong Yonggyun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산 121|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 1376[서재길 61-36](문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3월 18일연표보기 - 정용균 효행문서 및 정려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정용균 효행문서 및 정려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성격 정려비|고문서
제작시기/일시 조선 말기
소장처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 1376[서재길 61-36][문서]지도보기|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산 121[비]지도보기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조선 후기의 정용균(鄭龍均)에게 내린 정려비 및 관련 고문서.

[구성과 형태/내용]

1. 고문서 5점

가. 상서문 : 1879년(고종 16) 선비 208명의 연명으로 정용균의 효행을 관찰사에게 올려 정표(旌表)해 주기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가로 128.5㎝, 세로 57㎝의 저지(楮紙)에 해서(楷書)로 쓰여져 있고, 관찰사의 뎨김[題音]은 초서(草書)로 앞뒤에 쓰여 있다. 정용균은 평소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몸소 행하여 효자라 일컬어졌는데, 19세 무렵 그의 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신음하는 3년 동안 온갖 약재와 음식으로 시병(侍病)하였다. 이때 새가 날아들어 메추리를 마당에 떨어뜨려 주는 기이한 일이 세 차례나 일어났다고 한다.

나. 교지 a : 광서(光緖) 17년(1891) 6월에 효행이 탁이(卓異)하므로 증직(贈職)하라는 전지(傳旨)에 의해, 정용균을 통정대부 사헌부 감찰에 증직한다는 내용이다. 가로 73.5㎝, 세로 53㎝의 저지에 해서로 쓰여 있다.

다. 교지 b : 광서 17년 6월에 정용균의 처 유인(孺人) 최씨를 숙인(淑人)에 증직한다는 내용이다. 가로 73㎝, 세로 54㎝의 저지에 해서로 적혀 있다.

라. 교지 c : 광서 17년 6월에 정용균의 처 유인 최씨를 숙인에 봉한다는 내용이다. 가로 78㎝, 세로 54㎝의 저지에 해서로 쓰여져 있다.

마. 예조입안 : 광서 18년(1892) 5월에 ‘정용균은 효행이 탁이하여 정려(旌閭)를 내리니 예에 따라 관에서 정려문을 세워주고, 그 자손들에게는 연호잡역(煙戶雜役)과 환상(還上) 등을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다. 가로 115.5㎝, 세로 68.5㎝의 저지에 해서로 쓰여 있다.

교지 b는 교지가 내릴 당시에 정용균의 부인 최씨가 죽은 줄 알고 잘못 증직한 것으로 판단되며, 교지 c는 이를 정정하여 내려 보낸 것으로 보인다.

2. 정려비(旌閭碑)

이 정려비는 1897년에 세워졌고, 옥개석과 비신 및 받침돌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개석 모퉁이에서 바닥 받침돌에 이르기까지 활주 형태의 돌기둥이 옥개석을 받쳐주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비각에 비길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받침돌의 앞부분은 귀부(龜趺)의 머리 부분을 흉내 내려고 하였으나 조잡한 편이고, 받침돌의 나머지 부분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장방형에 비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 48㎝, 세로 139㎝, 두께 8.7㎝이다.

비석의 표제는 전면에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진양정용균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晋陽鄭龍均之閭)’라 예서(隷書)로 쓰여 있고, 비문 즉 정려기는 표제의 좌측에서 시작하여 뒷면을 거쳐 표제의 우측에서 끝맺어져 있으며 해서로 쓰여 있다. 이 정려기의 찬자(撰者)는 서계(瑞磎) 김인섭(金麟燮)[1827~1903]이다.

[의의와 평가]

정용균의 효행에 대해서는 『모재실기(慕齋實記)』와 「상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정려기를 지은 김인섭(金麟燮)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헌납을 지냈던 인물이며, 정용균과 동시대 인물이므로 그가 지은 정려기는 신필(信筆)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려가 되기까지의 과정 및 그 이후의 세역 면세 관련 사항까지 알 수 있어 중요하다. 2004년 3월 1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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