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곡
-
○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士谷里)에 있는 마을 이름. 두 개의 동네가 살기 좋다 하여 이덕실이라고 하다가 덕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 이덕실의 이자가 살쾡이 이(貍)자, 덕은 닭[鷄]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살쾡이와 닭을 형상한 마을 이름이라는 뜻이다. 살쾡이와 닭은 천적간이기에 덕실마을이 커지면 옆의 싹실마을(사곡)은 줄어들고 반대로 덕실마을이 작아지면 싹실마을이 커진다는...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의 마을이름 사곡이라는 지명은 원래 싹실 또는 씩실이었다. 살쾡이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싹실’ 혹은 ‘씩실’이라고 한다. 또한 ‘씰게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곡(隅谷) 정온(鄭溫) 선생이 동리를 사기만곡(士氣滿谷)이라 하여 사(士) 자와 곡(谷) 자를 따서 사곡(士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삵괭이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씩실 또는 이곡(狸谷)으로 불렀다가, 우곡(隅谷) 정온(鄭溫) 선생이 동리를 사기만곡(士氣滿谷)이라고 부른 것에서 사(士) 자와 곡(谷) 자를 따서 사곡(士谷)으로 불렀다고 유래된다. 1914년 진주군 대각면 사곡동, 대우동, 산청군 백곡면(栢谷面) 대우동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사곡리(士谷里)라 하였다. 사곡리는...
-
경상남도 진주시 서남쪽에 위치한 면(面). 수곡면 대천리에 큰 샘인 찬새미(한새미)가 있는데, 수곡면은 그 수계 지역으로서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에서 수곡(무실)이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서면(西面) 수곡리(水谷里)·원당리(元堂里)·이하리(蘺下里)·자매곡리(自梅谷里)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자매곡리(自梅谷里)가 이하리(蘺下里)에 합하여졌다. 1864...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온수리(溫水里)의 명칭에 대해 온천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 1980년대 초반 온천이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한다고 전하나 그 출처는 명확하지 않다. 온수리는 대사리와 천곡리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진성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진주군 내진성면 온수동이 온수리로 개칭되었다. 남쪽으로 하천이 흐르며, 경사...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옛날 사곡에서 살던 밀양손씨(密陽 孫氏)가 옮겨와 살면서 ‘엥기’라 하다가 그 후 원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1914년 하동군 가서면(加西面) 원계동(元溪洞)의 일부를 하동군 가종면(加宗面) 원계리(元溪里)라 하였다가 1955년 7월 1일 법률 제306호(1955. 6. 29. 공포)에 의하여 진양군 수곡면으로 편입되었다. 서쪽에 덕천강이...
-
경상남도 진주시 남동부에 위치한 면(面).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동면(東面) 진성리(晋城里), 가좌촌리(加佐村里), 반동산리(班東山里), 이천리(耳川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이천리는 진성리에, 반동산리는 가좌촌리에 합하여 각각 진성리, 가좌촌리라 하였다. 1864년(고종 1) 이후에는 이(里)가 면(面)으로 개칭되어 가좌촌면과 내진성면이라 하였다. 1914년 3월...
-
진주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와 성씨들이 대성을 이루어 모여 사는 마을. 진주는 신라시대 구주의 하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항상 영남의 계수관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토성세력도 강성하였다. 진주의 성씨는 정(鄭), 하(河), 강(姜),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
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진주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이다. 그런데 하연(河演)[문효공(文孝公)]이 1451년(문종 1) 처음으로 족보를 내면서 그 서문에 ‘세계가 전함이 없고 『고려사(高麗史)』에 홀로 하시랑 공진이 있어 듣기에 기쁘나 동원(同源)이면서 분파가 확실치 않다.’고 한 것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