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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전남방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62
한자 日帝强占期-全南紡織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소연

[정의]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가네보방적을 모태로 세워진 방적회사.

[광주에 면방공장이 들어오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면직물이나 면실을 판매하던 가네보[鐘淵]방적은 누에고치 생산량이 많았던 전라남도 광주군 지한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 제사공장[명주실 생산공장]을 건립하였다. 제사공장의 순조로운 경영에 자신을 얻은 가네보방적에서는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대규모 면방공장을 짓기로 한다. 광주 지역에 면방공장을 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광주에서 쌀과 보리 다음으로 가장 많이 생산되는 농작물이 바로 육지면(陸地棉)[일본이 수입한 미국 목화 품종]이었기 때문이다.

가네보방적 전남공장은 동양 최대 규모로 짓기로 계획 되었다. 공장 건설을 위해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전라남도의 면화 생산 현황과 전망, 공업용수와 종업원의 고용조건, 제품의 시장성 등 기초조사를 실시한 뒤 공장 유치에 성공하였다. 면방공장을 세우기 위해 당시 광주천 하류 일대[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16만 평[약 528,926㎡]의 부지 안에 있었던 임업시험장과 농사시험장은 자리를 옮겨야만 하였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살던 주민들은 가혹한 토지수용령에 따라 자신들의 문전옥답을 빼앗기고 떠나야만 했다.

가네보방적에서는 16만 평의 부지 중 7만 평[약 231,405㎡]에 공장을 짓기로 하고, 나머지 9만 평[약 297,521㎡]에는 광주 시민을 위한 시민공원 및 위락시설을 조성하여 광주에 기증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먼저, 공장 규모는 1933년 일본 산리쿠[三陸] 쓰나미 피해로 인한 건축 자재의 품귀와 가격 폭등 때문에 축소되었다. 또한, 시민공원은 식물원, 동물원, 공설운동장, 아동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사무소까지 설치하고 첫 단계로 풀장도 개장하였지만 중일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중단되었다.

공장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1935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에 가네보방적 전남공장이 완공되었다. 1935년 8월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가네보방적 전남공장은 방적기 3만 6000추[면사를 뽑아내는 정방기의 구멍]에 직기 1440대를 갖추어 질 좋은 전남산 면화와 저렴한 임금으로 연간 생산량이 면사 3만 고리[약 5,443톤], 면포 100만 필이었고, 종업원도 3000명에 달하는 공장으로서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큰 몫을 담당하였다.

[방직 노동자들의 삶]

가네보방적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들이었고 대부분 전라남도 지역의 농가 출신이었다. 그중에는 신식 문물을 동경해 광주 지역에 올라온 처녀들도 있었다. 하지만 농촌경제의 피폐로 인한 소작 빈농층의 생존의 압박에 의하여 충당된 노동자들도 많았다.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인하여 노동자 확보가 어려워지자 가네보방적에서는 전문적인 모집인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모집원이 농촌에 나가서 여공으로 갈 만한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때 대가로 광목 10마[약 9m] 정도를 주었다고 한다. 특히 1940년대 초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주로 여공을 대상으로 강제모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모집원은 대체로 목표인원을 정하고, 군이나 면에 나가 그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모집된 인원은 도망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여관에 집단 수용하여 데리고 오고, 모집원에게는 수고비가 지급되었다. 또한,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을 통한 노동력 부족을 메꾸기도 하였다. 근로보국대는 여러 산업시설이나 군사시설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 가네보방적에서도 이러한 근로보국대를 통해서 노동력을 확보하였다.

당시 노동자 채용은 신체 건강한 17세 이상의 노동자로 사칙에 규정되어 있었으나, 인력 부족 상태로 연령 미달자도 잡아들이다시피 하였다. 가네보방적의 노동자는 종업원과 노동자로 구분되었다. 사원은 월급을 받았고 나머지는 일당으로 계산하여 보수를 받았다. 근로조건이 열악하고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죽었으며, 특히 폐병이 심했다. 환자들이 발생해도 귀향시키기보다는 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에 입원시킨 이유는 작업장이 건강상 위험하다는 인식을 방지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노동자는 대부분 기숙사에 수용하였으며 2교대로 근무하거나 낮일만 하는 경우로 구분되지만,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공들은 2교대 근무였다. 기숙사 방 하나에 12명 혹은 20여 명까지 수용되었다. 기숙사는 후생복지가 아닌 일종의 감금시설로서 외출은 거의 금지되었다. 견디다 못한 여공들이 담 너머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일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내면 월급에서 터무니없이 공제하고, 옷을 완전히 벗겨 알몸으로 기숙사를 돌렸다. 작업 현장에서는 반장들이 여공들을 마구 때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1945년 초임 여공의 경우, 하루 열두 시간에서 열네 시간까지 일하며 일당으로 42전을 받았는데 거기에서 밥값 39전을 빼고 나머지 3전을 강제로 적금을 들게 하였다.

가네보방적 기숙사 여공의 하루를 살펴보면,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세면과 식사 후 작업장으로 이동하여 아침 6시부터 조업을 하고, 9시에 10분을 쉬고 12시에 점심을 위한 1시간의 휴식을 한다. 오후 1시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중간에 11분을 쉬고 다시 작업을 시작하여 저녁 6시에 종료된다. 저녁 식사와 목욕 후 9시에 취침하며 보통학교 미졸업자나 문맹은 교화계에 보내 교육을 하였다. 기숙사의 규칙은 결석 방지, 도주 방지, 건강 유지 등 노동력을 착취하고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공의 외출은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외출 신청 시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미귀환 시 소속반 전체 책임으로 돌아갔다. 저축은 강제적이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퇴사 시 찾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은 엄격히 통제되었고 쟁의는 거의 일으킬 수 없었다. 하지만 부분적 파업이 1936년 8월에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가네보방적의 경우 여공 탈주 사건이 한 달에 2회 꼴로 발생하였다. 1942년경 여공들의 파업이 있었는데, 생산된 베를 훔쳐 간다고 일본인 감독이 인격적인 모독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공들의 작업 거부로 시작된 파업은 남자 노동자들도 가담하여 소요사태로 발전했으나 곧 진정되었고, 주모자 색출을 위한 수개월간 수사를 진행한 뒤에 끝내 여공들이 징역에 처해졌다. 1945년, 11살 때 가네보방적으로 끌려갔던 최씨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구전 노래로 무섭고 서러웠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지섣달 진진 밤에 밤잠 못 자고, 이삼 사흘 긴긴 해에 바람 못 쐬고, 오뉴월 더운 날에 바람 못 쬐고, 인정 없고 사정 없는 쓸쓸한 종방. 문방 놈아 잡지 마라 갈 길 바쁘다. 기차 소리 한번 나면 그만이로시."

[광복 후 혼란을 극복하다]

가네보방적 전남공장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군복 원단을 생산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으로 공장 내 한국인 종업원들은 흥분으로 들떴다. 하지만 이 흥분과 기쁨은 곧 무질서와 혼란으로 바뀌었다. 일본인 관리직원과 일부 몰지각한 종업원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공장의 비축물자와 기자재를 마구 가져갔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공장 관리를 위한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광주청년단 선발대와 광주치안대도 합세하여 공장시설과 물자 경비, 특히 일본인들에 의한 절도와 시설 파괴를 감시하였다.

가네보방적 전남공장은 설비와 경영이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왔던 까닭에 한국인들은 어깨 너머로 이것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대부분의 공장 부품과 원료를 일본에서 공급받아 왔고, 숙련된 한국인 기술자가 없어 일본인들이 떠난 뒤 공장은 가동을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건에도 종업원들의 노력 끝에 1945년 9월 공장 가동을 재개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1945년 말에는 한국인 종업원들 스스로 공장을 거의 정상 가동을 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전남방직공사(全南紡織公社)가 설립되었고, 당시 공장은 방적기 3만 8368추와 직기 1510대로 연간 100만 필 이상의 생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1945년 10월 미군이 광주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된다. 미군정은 가네보방적 전남공장의 처리를 담당하는 미국인 고문관을 보내어 미군 5명과 한국인 공장 관리인으로 내정된 김형남을 데리고 공장에 등장하였다. 이때 상황을 당시 전기공이었던 김정순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어느 날 인사 책임자인 조병권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미군이 김형남을 공장장으로 앉히고 우리가 뽑은 박무길은 창고주임으로 보낸다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미국인은 여론을 중시한다니 이 문제를 종업원대회에 부치도록 하자고 했다. 그래서 11월 초에 작업을 하다 말고 전 종업원들이 기숙사 2층 강당으로 모였다. 약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이자 빠뽀[미국인 고문관을 부르는 속칭]가 단상에 올라 한국인 노동자들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영어로 "김형남 공장장, 오케이?"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노동자들이 웅성웅성 하고 있는 사이 내가 일어나 "이제까지 우리 힘으로 잘해 왔는데 새 공장장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빠뽀가 권총을 빼들고 쏘려고 하자 김형남이 끼어들어 빠뽀를 일단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김형남이 단상에 올라가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일해 보려고 왔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라 하면 쓸 것이요, 무엇이든 하라고 하면 할 터이니 여기서 일하게만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다시 일어나 "당신 필요 없소. 당장 보따리 싸들고 나가라. 이제까지 우리 힘으로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자신이 있다."고 말하자 모든 노동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김형남은 나가라!"고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김형남은 일단 공장 관리인 대신 공장 통역관과 신입사원 모집책으로 공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공장 책임자인 박무길을 전라남도 광주부 학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의 제사공장 책임자로 전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김형남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종업원들에 의한 공장의 관리기간이 끝나게 되었다.

관리책임자로 임명된 김형남은 미국 캔터키주 웨슬리안대학과 뉴욕주 프래트공과대학을 나온 공학도였다. 공장의 전면 가동을 위해 아직 체류 중이던 일본인 기술자 7명의 협력을 받아 종업원들에게 야근을 시켜가며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기계와 밤낮으로 씨름하며 부품이나 기술 문제를 조금씩 헤쳐 나가며 공장을 정상화시켜 나갔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될 무렵에는 생산량을 일제강점기 수준으로 회복시킬 정도로 공장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 무렵 공장 종업원은 남자 800명, 여자 1600명 등 모두 2400명이었으며 그중에 1700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일제 때부터 있었던 공장 부설 병원도 다시 개원하여 종업원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의료 활동을 하였다. 또한, 공민학교를 설립해 교육을 받지 못한 종업원들을 하루에 2시간씩 교육하였다. 종업원들도 '우리 동포의 옷감을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단합된 모습을 보이며 공장은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6.25전쟁의 아픔을 극복하다]

전남방직공사가 정상의 모습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공장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시설의 90%가 파괴되었고 건물의 80%가 소실되었다. 하지만 김형남과 종업원들은 부품과 기계를 모아 재조립하기 시작하였고, 공장 안에 자체 철공소를 두고 부품과 설비를 재생시켰다. 이런 노력으로 재건 착수 10개월 만인 1951년 9월 공장 가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정부로부터 전남방직공사를 주식회사로 불허 받아 1952년 2월 23일 전남방직이라는 새로운 주식회사를 발족하게 되었다.

[두 개의 회사로 나누어지다]

그 후 전남방직은 기업의 대형화에 따라 1961년 4월 일신방직(新紡織)과 전남방직으로 분할되어 일신방직은 김형남, 전남방직은 김용주가 각각 대표로 취임하였다. 김형남과 김용주는 1953년 전남방직을 인수할 때 공동으로 참여하여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관계였다. 이후 전남방직은 1970년 상호명을 전방(全紡)으로 바꾸었다. 전방과 일신방직은 국내 섬유 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계열사를 넓히며 성장하고 있다.

[전남방직 공장 부지의 미래]

전남방직 본사는 1956년 서울로 이전하였고, 전방과 일신방직 두 회사 모두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공단에 2007년[일신방직]과 2011년[전방] 공장을 준공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섬유산업의 쇠퇴와 경영환경의 변화로 2017년 전방 임동 공장이 가동 중단되었고, 2020년에는 일신방직 임동 공장도 가동 중단되었다.

전방과 일신방직의 임동 공장은 공업용지에서 상업용지로 변경되어 2021년 공장부지 개발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 있다. 10만 평[약 330,579㎡]에 가까운 넓은 부지, 광주천과 도심과 가까운 위치로 인해 개발을 놓고 광주광역시와 인근 주민, 시민 단체의 의견이 다양하다. 1930년대부터 역사를 간직한 근대 역사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는 노력과 도시 재생 및 경제적 발전을 위한 개발이 공존하는 미래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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