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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충효마을 광산김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12
한자 忠孝洞忠孝-光山金氏世居地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67가구[1990년 기준]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광산 김씨 세거지.

[개설]

충효동(忠孝洞)에 정착한 인물은 광산김씨 낭장공파 김규(金珪) 14세의 후손 김문손(金文孫) 27세이다. 김문손은 오늘날의 서구 벽진동에서 살던 김자침(金自沈)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당시 석보면 성촌에 살던 노맹준의 딸에게 장가가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어, 그 후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김문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김유장, 증조부 김부의 3대는 벽진동에 설단하여 모시고 있다. 벽진동에 살았던 연고로 1604년 회재 박광옥(朴光玉)[1526~1593]을 모신 벽진서원이 세워졌으나 1678년 벽진서원김덕령(金德齡)[1567~1596] 3형제가 추대되었고, 의열사라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의병장 김덕령은 김문손의 현손[5세손]이다. 김덕령은 무고로 옥사한 뒤 1661년 신원되고,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金德普)[1571~1627]의 증손자를 봉사손으로 정하여 그 후손들이 주로 충효동의 성촌, 이치 등에 살고 있다. 김덕령이 사면되고 정조는 1788년 석보면 성촌을 충효리라 부르도록 표리비명을 하사하여 1792년 충효리에 그 비와 비각이 세워졌다. 배재[梨峙]에 있던 충장공의 묘소 아래에 1979년 충장사가 세워져 충장공을 모셨다.

[자연환경]

김문손의 손자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1501~1572]는 과거에 급제하여 나주목사를 지내고 충효리에 은거하였다. 김윤재의 누나에게 소쇄원을 창건한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장가와 충효리 냇가 건너 괸돌에 처가 살림을 차렸다. 양산보는 다시 둘째아들 양자호를 작은 처남 윤충의 딸에게 장가보내 처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김문손의 둘째아들 김감은 장성 울산김씨 김세광의 딸에게 장가갔다. 김감은 처갓집 젊은이 김백균을 사위로 삼았다. 김백균은 압촌에 살던 제봉 고경명(高敬命)[1533~1592]을 사위로 맞았다. 김윤제는 집에서 4㎞쯤 거리의 송강에 을사사화로 피신와 있던 정철(鄭澈)[1536~1593]을 외손녀와 결혼시켜 돌보았다. 김윤제의 5촌 조카 김성원[1525~1597]은 담양부사를 지낸 석천 임억령(林億齡)[1496~1568]의 서녀를 얻어 장인 임억령이 지내도록 서하당식영정을 지어 모셨다.

충효리 김씨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인척 관계로 1540년 충효리 김윤제환벽당(環碧堂)[2013년 명승으로 지정]을 짓고, 좀더 앞선 1530년 양산보가 소쇄원(瀟灑園)[2008년 명승으로 지정]을 지었다. 1560년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 식영정(息影亭)[2009년 명승으로 지정]을 지어 일동삼승의 명승지가 되었다. 김윤제의 큰집 손자들 김홍령, 김덕령, 김덕보의 삼형제가 임진왜란 때 공훈을 세워 동네 이름마저 바뀌고, 동네에 충효비, 정려비와 비각이 세워졌다. 동네 어귀에 1976년 광주호가 막히고 생태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내 건너 지석[괸돌]에 가사문학관이 개관되어 면 이름마저 담양군 남면에서 가사문학면으로 바뀌었다.

[현황]

1990년 충효리 72가구 가운데 67가구가 광산김씨였다. 생태공원, 가사문학관 등 관광 대상이 생겨나면서 상인들이 들어와 농사짓던 김씨들이 시내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60% 가량으로 줄었다. 다시 원효사 지구 상인들이 충효리에 문화마을을 만들어 57집이 입주하게 되면서 김씨 집성촌은 명세뿐이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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