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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077
한자 胎封山|胎峰山|台峯山
영어공식명칭 Taebongsan Mountain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현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구간 태봉산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122-4
해당 지역 소재지 태봉산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122-4 지도보기
성격
높이 52m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 있었던 산.

[개설]

태봉산신안동에 있었던 높이 52m의 작은 산으로, 인조의 아들 용성대군의 태를 묻었던 산이다. 태봉산을 헐어내어 경양방죽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고 지금은 태봉산유래비만 남아 있다.

[명칭 유래]

고지도에는 태봉(胎封)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호남읍지』[1871], 『광주읍지』[1895]에는 태봉(台峯)이라고 하였다. 『1872년지방지도』에서 전라좌도광주지도에는 금교방축(金橋防築)[경양방죽] 수로가 대야(大野) 가운데 5리[약 2㎞] 떨어진 곳의 '고려왕자태봉(高麗王子胎封)'이라고 표기된 산봉우리를 감싸고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 그림이 있다. 『1:10000 지형도』-광주[1916]와 『사진으로 본 광주(光州) 100년』[1989]에서는 '胎峰山(태봉산)'이라고 표기하였다.

전남대학교가 자리 잡은 구릉지가 용의 형상인데 여의주가 필요하여 조성한 비보가 태봉이니 '광주의 여의주'라 칭하였다.

[자연환경]

신안동의 논밭 가운데 있던 태봉산은 광주시내와는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967~1968년 태봉산을 헐어서 경양방죽을 메우는 데에 사용하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리자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을 매립한 자리[현 광주역북구 신안동 122-4번지]는 한때 시청사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남서쪽 모퉁이에 태봉산유래비만 서 있다.

[현황]

태봉산에 명당이 있다 하여 암장(暗葬)을 많이 하였는데, 암장을 하면 날이 가문다는 풍수설이 있었다. 1929년 7월 하순, 광주에 가뭄이 심하자 마을 사람들이 태봉산의 암장묘 때문이라며 암장묘를 찾다가 화강석으로 된 태실과 백자태호(白瓷胎壺) 1점, 명기석반(銘記石盤) 1점, 금박(金箔) 1매를 발견하였다. 태봉산에서 나왔던 태실의 부장품인 백자태호, 명기석반, 금박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복제품이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태봉산에서 나온 태실은 1624년(인조 3)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몽진하였을 때 출생한 아지씨[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의 태를 묻은 돌항아리이다. 태실은 전체 높이 1m, 덮개 지름 120㎝ 크기이고, 돌항아리 밑에 지름 6㎝의 구멍이 뚫려 있다.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1950~60년대에는 광주시내 학생들의 소풍장소 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태봉산동구 소태동 275-6에 있는 임태봉산[94m]은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었다고 한다. 제2순환로를 개설하면서 없어졌다는 소태동 태실은 덮개와 밭침이 봉합된 한 쌍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덮개 한 개만 노출되어 있었다. 주인공을 모르는 태실이며, 크기는 지름 90㎝, 높이 30㎝, 둘레 300㎝이다. 소태동 태봉산 위의 등성이를 탯등이라고 부른다.

태봉과 같은 음으로 불리는 산으로 북구 망월동 분토 남쪽에 있는 산이름도 태봉(台峯)[277m]이다. 또 다른 태봉으로 남구 노대동 동쪽에 있는 태봉(太峯)처럼 태(胎)와는 상관없이 산이 크다고 하여 태봉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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