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80
한자 朴希壽
영어공식명칭 Park Huisu
이칭/별칭 덕로(德老),회헌(悔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0년연표보기 - 박희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박희수 전라도 광주에 의병청(義兵廳) 창설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박희수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박희수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 제수
몰년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박희수 사망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형조좌랑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박희수(朴希壽)[1540~1599]의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회헌(悔軒)이다. 할아버지는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상(朴祥)이며, 아버지는 부사(府使) 박민제(朴敏齊)이다. 박희수는 박민제의 동생 진사(進士) 박민중(朴敏中)의 양자가 되었다.

[활동 사항]

박희수는 1540년(중종 35)에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일찍 문장을 깨우쳤다. 박희수의 종숙(從叔)인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어린 박희수에게 집안을 빛낼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박희수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옥과 함께 목사 정윤우(丁允祐)에게 "적병이 아직 영(嶺)을 넘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요충(要衝)을 방어한다면 나가서는 한강에서 막을 수 있고 물러가서는 영로(嶺路)에서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나주에 있으므로 공께서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라고 고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이후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고 나서야 군사를 끌고 금강(錦江)으로 이동하였으나 선조의 서천(西遷)과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을 파하였다. 이에 박희수가 재종(再從) 박대수(朴大壽)와 함께 이광을 크게 꾸짖었다.

박희수는 1592년(선조 25) 고경명(高敬命), 유사경(柳思敬) 등과 함께 전라도 광주에 의병청(義兵廳)을 창설하였고, 가동(家僮) 64명과 쌀 80석을 내고 향병(鄕兵) 1,000여 명을 모아 의병소에 보냈다. 또한, 박희수는 장성의 왕자사부(王子師傅) 정운룡(鄭雲龍), 전라도 광주의 진사 박종정(朴宗挺), 생원 유사경, 회재 박광옥 등의 상소문을 직접 행조(行朝)에 전달하였다. 박희수가 바닷길을 건너 의주에 도착하자 선조가 누구인지 물었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선정신(先正臣) 박상의 손자라고 답하니 선조가 기뻐하며 칭찬하였다. 박희수는 1592년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한 공로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에 제수되었고,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은둔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1599년(선조 32)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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