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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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一韓 |
영어음역 | Ilhan New |
이칭/별칭 | 일형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진 |
[정의]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사업가이자 교육자.
[활동사항]
유일한(柳一韓)은 1895년(고종 32) 평양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1971년 사망하였다.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서양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 일본을 앞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04년 아홉 살의 유일한을 대한제국 순회공사였던 박장현의 손에 맡겨 미국에 조기 유학을 시켰다. 말이 조기 유학이지 집으로부터 생활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일한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신문 배달 등 고학을 하며 학업에 열중하였고, 1912년 헤스팅스고등학교 때는 재능 있는 미식축구 선수로 장학금까지 받았다. 1915년 미시건대학에 입학하였고 1919년 대학 졸업 후 제너럴일렉트릭사(General Electric Co: GE)에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입사, 회계사로 일하였다.
유일한은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 때부터 민족을 위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유일한은 결심한 대로 좋은 직장이었던 GE사를 그만두고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인 라초이식품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었으며, 그 이익 중 일부를 독립운동에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4년 미국에서 질 좋은 녹두를 구하기 점점 어려워지자, 좋은 녹두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 일시 귀국하였다.
미국에서는 잘 알지 못하였으나 조국에 돌아온 유일한은 일제강점기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일한은 미국에서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1926년 12월 31세의 나이로 영구 귀국하였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결심대로 헐벗은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질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좋은 약을 제공해주어, 한민족의 생활 문화를 향상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 내리고 조국의 동포들을 돕고자 개인의 사비로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최상의 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제약회사로 키웠다. 종업원 지주제, 전문 경영인 도입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의 기업을 일체의 혈연관계가 없는 경영인에게 물려주었을 뿐 아니라 유언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였다. 생전에 자신의 돈을 털어 교육기관을 세웠다. 1954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고, 1960년대에는 한국직업학원과 유한공업고등학교[구로구 항동 소재], 유한중학교를 차례로 설립하고 자선 단체를 만드는 등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사업들을 펼쳤다.
사후 유한양행은 오직 제약회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우량기업이 되었다. 구로구 항동 10-8번지에 위치한 유한공업고등학교는 1952년 12월 12일 경기도 소사에 설립한 고려공과기술학교가 전신이다. 고려공과기술학교는 1962년 10월18일 재단법인 유한학원으로 인가받아 초대 이사장으로 유일한 박사가 취임한 후,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로 개명하여 현 위치로 옮기고 신축 교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훈과 추모]
건국훈장, 독립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민훈장, 모란장, 국가공익포장 등을 수상하였고, 1996년 6월의 문화인물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