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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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영어음역 | Gwangsangimssi |
영어의미역 | Gwangsan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집필자 | 김정진 |
세거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1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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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1동 잣절마을 |
입향시기/연도 | 1600년경 |
성씨시조 | 김흥광(金興光) |
입향시조 | 김계원(金繼元) |
[정의]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계원을 입향조로 하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세거 성씨.
[연원]
광산김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 중 하나이다.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의 셋째 아들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가족을 데리고 경주에서 무주(武州)[현 광주]로 피난하여 은거함으로써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무진주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의 토호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던 12세손 김광세(金光世)와 아들 김경량(金鏡亮)이 대장군(大將軍) 벼슬을 하여 무반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14세손 김주정(金周鼎)과 15세손 김태현(金台鉉)이 고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약 명문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정2품 벼슬인 평장사(平章事)를 8명이나 배출하여 시조가 은거한 곳을 평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대로 석학(碩學)·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하였다.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가 나와서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으며,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이 나왔다.
[입향경위]
조선 후기 1600년경에 광산김씨 19세손 공조참의 모친이 부천 개봉리 잣절[현 구로구 개봉1동]에 터를 잡은 후, 손자 김계원(金繼元)이 정착하여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황]
구로 지역의 광산김씨는 입향조 김계원의 정착 이래 37세손 18대 400여 년을 살고 있다. 2000년 11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광산김씨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1동을 비롯하여 구로구 전 지역에 2,496세대 8,04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