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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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升旦 |
영어음역 | Yu Seungdan |
이칭/별칭 | 유원순(兪元淳),문안공(文安公),인동백(仁同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고려 후기 문신이자 인동유씨 시조.
[개관]
인동유씨(仁同兪氏)는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진 유승단의 후손들이 인동에 세거함에 따라 후대에 유승단을 시조로 하고 세거지 인동을 관향으로 삼으면서 생겨났다.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유원순(兪元淳). 인동유씨는 유승단 이후 세계가 끊어졌으며, 고려조에서 예부시랑을 지낸 1세손 유승석을 중시조로 대를 잇고 있다. 유승석의 동생인 유성렬의 증손 유면(兪勉)이 인동 이웃 고을 선산 부근 봉황장원장(鳳凰壯元場)에 살았음이 보서(譜書)에 기록되어 있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5세손 유사철은 벼슬이 경상도관찰사에 이르렀다. 9세손 유진(兪鎭)은 조선 성종 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인동유씨의 주요 세거지는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동이었다.
[활동사항]
유승단은 고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그 요속(僚屬)으로 선발되었다가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시학(侍學)이 되었으나,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강종이 강화로 추방되자 그도 배척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희종 때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의 사록참군이 되었으나, 유수 최정화(崔正華)와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수궁서승이 되었다가 뒤이어 사부가 되었다.
1223년(고종 10)에 예부시랑우간의대부가 되었고, 1227년에 수찬관으로서 최보순(崔甫淳)·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이듬해 추밀원부사좌우산기상시에 올랐고, 뒤이어 참지정사가 되었다.
1232년에 최우(崔瑀)가 재추(宰樞)를 소집하여 강화 천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말을 못하였으나 다만 유승단만이 종사를 버리고 섬에 숨어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나라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최우는 유승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강화 천도를 결정한 뒤 녹전차(祿轉車) 100여 대로 자기의 가재 도구들을 강화로 옮겼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유승단은 성품이 침착하고 겸손하며 독서의 범위가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특히, 고문에 정교하여 ‘원순의 문장’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고종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글을 배웠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경사(經史)에도 조예가 깊어 뜻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하여 의심이 없게 하였으며, 불전(佛典)에도 능통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 등에 전해지는데 그 중 「독락원(獨樂園)」은 다음과 같다.
“동편 언덕에 세상 티끌 하나없고 서편 산기슭엔 돌길이 좁구나. 연못에선 고기들이 즐겁게 춤추고 뜰앞에 길들인 새들은 아니 날아가네. 버들은 봄날 푸른 장막을 치고 꽃들은 한낮에 붉은 옷을 자랑하는 듯. 내가 시를 쓰는 곳에선 수풀과 샘물이 붙잡고 아니 놓아 주노라(東皐塵跡斷 西麓石蹊微 樂沼魚相舞 馴階鳥不飛 柳春張翠幄 花午酒紅衣 喜我題詩處 林泉不放歸)”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 어운산(御雲山)에 있다고 구전되어 왔으나,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540-2번지 임야 내에 있다. 고려조의 정승 묘라 하여 도굴되어 비석, 비명, 비갈, 상석 등이 없어졌으며, 2개의 문인상 석물만이 남아 있다.
1699년(숙종 25) 인동부사 최문징(崔文徵)이 간행한 『옥산지(玉山誌)』에는 시조 유승단의 거주지에 대해 “인동부 동쪽 신촌 태안리이다. 일설에는 마적동이 문안공 유원순의 집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마적동은 일명 우담동(牛譚洞)으로 임수동 500번지 안팎의 주거지이다. 묘소는 문안공 유원순의 집 터 바로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사후에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졌다. 당대의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이규보(李奎報)는 「제유정승문(祭兪政丞文)」에서 다음과 같이 유승단을 추모했다.
“아! 슬프다. 문장과 덕행이 고금에 제일이니, 마치 하늘 높은 것을 장하다고 칭찬하는 것 같아서 여기에 감히 아뢰어 말하지 못하겠노라. 임금께서 옛날에 왕위에 오르기 전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은 실상 스승이 되었는데, 풍운이 서로 만나 지난 날의 둔난(屯難)하고 기험(奇險)한 것을 씻어 버리고 말 고삐를 놓고 빨리 달려가 정승 자리에 올랐도다.
귀감이 공에게 있어 임금께서 의지하려 하셨는데, 나라의 기둥이 갑자기 넘어지니 누가 슬프지 아니 하리요. 부귀가 급히 오는 것을 내가 본래 두려워하였거늘, 이 때문에 그런 것이었을까. 어찌 홀연히 돌아가시나이까? 집에 부인이 없으니 누가 내차에서 울 것이며, 백도(伯道) 같은 아들이 없으니 누가 제사를 받드리오.
아! 슬프다. 생각하건대 옛날 승선과(僧選科)를 보일 때에 공이 이것을 주관하여 나를 장원으로 발탁하였으니, 이로써 영화가 아니 넘쳤으며, 나를 아들같이 길렀으니 은혜가 또 한량없도다. 유언을 받은 뒤로 공경히 명심을 하였으나, 내가 오활한 탓으로 장사 치르는 일도 제대로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도다. 광음이 머물지 아니하여 졸곡(卒哭)이 돌아왔도다. 불사(佛事)를 베풀어 놓고 찻잔을 올리니, 아! 상국(相國)이여, 나의 슬픔을 압니까? 슬프다. 상 향(尙 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