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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28
한자 裵尙瑜
영어음역 Bae Sangyu
이칭/별칭 공근(公瑾),만학당(晩學堂),숭정처사(崇禎處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622년연표보기
활동 1677년연표보기
몰년 1686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서원
신도비 경상북도 김천시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성산(星山)
대표 관직|경력 사직참봉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공근(公瑾), 호는 만학당(晩學堂)·숭정처사(崇禎處士).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참판 배흥립(裵興立)이고, 아버지는 현감 배명전(裵命全)이다. 배태래와 배태휘(裵泰彙)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배태래[1651~1701]는 자는 내보이고, 호는 농수(農叟)이다. 경학에 밝아 숙종조에 관찰사의 천거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강선(姜銑)·강현(姜鋧)·박만정(朴萬鼎)·임수간(任守幹) 등과 도의로 사귀며 강마하였고, 학자로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활동 사항]

배상유(裵尙瑜)[1622~1686]는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한성 출신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다. 27세 때 정월 초하루 이언적(李彦迪)의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읽고 크게 분발하였으나,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숭정처사라 부르며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바깥일을 사절한 채 학문 탐구에 더욱 정진하였는데, 책을 읽을 때면 침식조차 잊었다고 한다.

1672년(현종 13) 재주와 덕망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77년(숙종 3) 다시 유일로 사직참봉(社稷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잠시 벼슬길에 나가 있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86년(숙종 12)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8세에 고종형 도계 유념(柳淰)의 수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설봉 강백년(姜柏年)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허목(許穆), 유형원(柳馨遠), 김상용, 신석번(申碩蕃), 이현일(李玄逸), 홍여하(洪汝河)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평소 만학당 벽에 ‘경계잠(警戒箴)’을 써 붙이고 스스로를 엄하게 하였다. 또한 숭명대의(崇明大義)를 존중하여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즐겨 외웠으며, 척화신(斥和臣) 김상헌(金尙憲), 이목(李楘)과 더불어 『춘추(春秋)』의 의리를 강론하였다. 후에 김산(金山)의 만력동(萬曆洞)에 은거하다가 영력(永曆) 연간의 글을 얻어 보고 명나라로 귀의하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였다.

1678년(숙종 4) 상소로 심학성리(心學性理)의 요체와 당론을 억제하고 현재(賢才)를 가려 쓰는 데 대한 설을 개진하였으며, 또 동년배 유형원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보인 전제(田制)·병제(兵制)·학제(學制) 등의 7조를 시행하자고 건의하여 숙종이 이를 가상하게 여겼다.

한양에서 전원으로 돌아온 뒤 만력동에 집을 짓고 ‘만학당(晩學堂)’이라 편액을 단 뒤 『대학(大學)』·『근사록(近思錄)』의 취지와 요지 및 각 경전의 난해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손수 베껴 가며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의 설을 깊이 연구하였다. 유형원과의 왕복 논란에서 질문이 조리 있고 치밀하여 유형원배상유의 학식과 도덕을 높이 칭송하였다 한다. 저서에 문집 4권과 사례비설 1권, 연보 1권 등을 남겼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칠서변의(七書辨義)』·『이기설(理氣說)』·『대학발휘(大學發揮)』·『근사록요서』 등을 저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던 삼강서원에 배향되었고, 김산 신하촌에 강기가 적은 신도비가 섰다. 또 정조가 『존주록(尊周錄)』에 그의 이름을 올렸고, 뒤에 도헌제주에 증직되었다. 또한 1873년(고종 10) 강백년의 후손 강노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대사헌겸성균관좨주로 품계가 올랐다. 행장은 최주하가 쓰고, 묘갈은 강현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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