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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05
한자 韓雍
영어음역 Han Ong
이칭/별칭 백희(百熙),정포(靜浦),평절(平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352년연표보기
활동 1390년연표보기
활동 1404년연표보기
활동 1406년연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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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425년연표보기
출생지 개성시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묘소|단소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산76번지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곡산(谷山)
대표 관직 개성유후사

[정의]

조선 초기 김천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백희(百熙), 호는 정포(靜浦). 증조할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평장사 한예(韓銳)이고, 할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한진(韓瑨)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한방좌(韓邦佐)이다. 아들로 한권(韓卷)을 두었다.

[활동사항]

한옹(韓雍)[1352~1425]은 개경에서 태어났으며, 아량과 재질이 탁월하였고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다. 고려의 기운이 쇠약해지고 개경이 혼란을 맞으면서 남쪽으로 이거하여 김산 하로 와계촌[현 김천시 양천동]에 정착하였다. 1390년(공양왕 2) 경상도감사 장하(張夏)의 천거로 사천감무가 되었으나 2년 뒤 고려가 멸망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한옹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사헌부감찰을 제수하였고, 이후 형조도관좌랑과 적성감무를 거쳤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박포(朴苞)의 무리를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녹훈되었다.

1404년(태종 4)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검교전서(檢校典書) 김귀진(金貴珍)의 양천 변정을 잘못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향리로 물러났다. 1406년(태종 6) 태종한옹을 사헌부장령으로 불러 이저(李佇)의 고신(告身)을 모아 봉해 올리게 하였다. 한옹은 막 김천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일의 시말(始末)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동료와 의논하기를 요청하였으며, 반면에 사헌부대사헌 한상경(韓尙敬) 등이 예궐(詣闕)하여 이저의 불궤 도모 사실을 강조하고 고신을 돌려주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은 결국 이저를 탄핵한 사헌부대사헌 한상경과 함께 그를 순금사(巡禁司)에 내려 조사하게 하였다. 그 일로 좌천되어 종부시판관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군기감으로 충청도경차관이 되어 민간(民間)의 질고(疾苦)를 묻고, 각 관영의 폐단을 금하며 병과 선박의 허실을 점검하는 한편 군졸의 고충과 희락을 점검하였다. 이때 한옹은 근래에 병선(兵船)을 만드는 일 때문에 소나무가 거의 다 되었으니, 각도(各道)의 수령으로 하여금 소나무가 자랄 수 있는 산에 불을 금하고 벌채를 금하며, 매양 정월[孟春]에 수령이 친히 감독하여 소나무를 심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한옹은 충청도경차관·경상도전민찰방(慶尙道田民察訪)을 역임한 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승진되었으며, 순금사대호군(巡禁司大護軍)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사헌부대사헌 윤향(尹向)과 함께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신극례(辛克禮) 등에 대해 대의로 결단하여 왕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408년(태종 8) 한옹은 전라도해도찰방(全羅道海道察訪)을 거쳐 충청전라도감전경차관(忠淸全羅道監戰敬差官)이 되었다. 이는 왜선(倭船) 14척이 고만량(高巒梁)에 이르러 전라도의 조전선(漕轉船)을 약탈하려 한 것을 막지 못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조사에 의하면 왜선 14척이 각 포구에 침입하여 병선(兵船)을 빼앗고 인물(人物)을 노략하였으나 방어(防禦) 면에서 기강이 엄하지 못하고 비어(備禦)의 계책이 없었다. 이에 대해 한옹은 방어하지 못한 일에 관련이 있는 군민관(軍民官) 6품 이상은 직단(直斷)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옹은 수시로 농사의 중흥과 관련한 정책을 간언하여 태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태종은 경연에서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다. 국방도 농업에 달렸다. 한수를 막고 백성이 마음 놓고 농사짓게 하는 것이 후생이다. 일찍이 지방 수령에게 제방을 쌓고 수리 시설을 완비하라 명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더니 관찰사 한옹만이 내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라고 치하하였으며, 당대의 명신 하륜(河崙)도 “한옹의 뜻이 백성을 위함에 있으니 각 도의 백성을 교화하고 농사를 장려할 적임자는 한옹뿐입니다”라면서 적극 추천하였다.

1409년(태종 9) 병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경차관으로 지방에 내려가 군자전·공신전 등에서 세금을 걷어 군량을 판비(辦備)하였다. 1410년(태종 10)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11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가, 1412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415년(태종 15) 개성부유후(開城副留後)가 되었으나 경상도관찰사로서 동불(銅佛)을 파괴하여 군기감에 충당하여 화통철(火㷁鐵)에 보태도록 한 일을 승인한 문제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16년(태종 16) 병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1등 공신의 훈호와 함께 의정부좌찬성으로 승차하였다. 1418년(태종 18) 인수부윤(仁壽府尹), 1419년(세종 1)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역임하였다. 이후 한옹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가 1425년 7월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양천동 산76번지[안정계 남쪽 뒷산인 배밭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세종한옹의 죽음을 애도하여 사흘간 조회를 열지 않았고 예관을 통해 부의금과 제문을 내려 장례를 치르게 하고 평절(平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제문에서 “법을 시행함에 삼가고 근실하였으며 검소 절약함이 관리의 표상이다. 충언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상벌에 사심이 없었다.”라고 애도하면서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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