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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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沙坪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나각순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었던 조선 시대 한강 사평나루 인근의 공무여행자(公務旅行者)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
[개설]
조선 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로 원이 있어, 역제(驛制)와 더불어 역원제도로 운영되었다. 강남구 지역에는 조선 시대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한강 남안에 사평원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역원제의 변형 모습인 참점(站店)으로 신원점(新院店)과 율현점(栗峴店)이 운영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국 시대 우역(郵驛)제도가 운영된 이래 고려 시대에 역참이 전국적으로 조직 운영되었으며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 도성 내의 도로정비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간선·지선도로를 망라하여 대·중·소로의 등급을 정하고 도로교통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관할구역을 정해 역원을 설치하였다.
이중 원은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1,310개소가 설치 운영되었다.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 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향리·관리로써 대로는 5호(戶),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하였다. 이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주는 대신 원의 운영 책임을 맡겼다. 또 원의 운영경비로 원위전(院位田)을 주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원은 교통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였다. 또 지방에서 기로연(耆老宴)를 베풀기도 하였고,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공무여행자 뿐만 아니라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과 숙박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나와 사평원에 머물며 죽으로 요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우의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고 폐지되기가 일수여서 공무여행자의 숙식을 관·역이나 민간업자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후 파발제도의 실시와 함께 파발의 참(站)마다 참점이 설치되었는데, 이 참점은 후에 주점·주막으로 부르는 거리 집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평원 인근에 장시가 열려 사평장(沙平場)은 상업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인근의 송파장과 더불어 전국 15대 향시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0대 이후 서울특별시로의 행정구역 편입과 한강 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내용]
강남구 지역은 삼남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지나고, 한강 조운로(漕運路)가 통하는 지역으로 강북의 한강나루와 이어지는 강남의 사평나루에 원이 설치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사평나루는 삼국 시대부터 한강 이북과 이남을 잇는 중요 길목이었으며, 고려 시대에 정식으로 사평나루[사평도]를 설치하면서 당시 임진강의 임진도와 더불어 대표적인 나루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한성에서 지방으로 연결되는 전국도로망 가운데 제4로와 5로가 이 사평나루를 지났다. 이에 15세기에 들어 국가가 운영하는 원이 설치되면서 사평원이 등장되었다. 이 사평원은 지금의 한남대교 남단 신사 중학교 일대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 광주부 서쪽 35리 지점 언주면의 신원점과 연결되어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판교와 북쪽 20리 지점에 있는 한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중간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광주부 서남 25리 지점 대왕면에는 율원점이 있어 남으로 20리 거리에 판교로 이어지고 동남쪽으로 15리 거리에 추령(秋嶺)으로 이어져 용인에 이르는 통로가 되었다. 또 북쪽 15리 거리에 삼전도를 건너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한양 도성을 나와 한강나루를 건너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대로 길목에 위치한 원으로 당시 대로변에 설치된 중요 교통로를 운영하는데 큰 역할을 한 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