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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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이우태 |
[정의]
삼한 시대로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의 역사.
[마한과 성읍국가]
청동기 시대를 지나면서 한반도의 남쪽에는 많은 수의 초기 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들 초기 국가들을 흔히 성읍국가라고 부른다. 한반도 남부의 성읍국가들은 크게 마한, 진한, 변한의 세 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강남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에는 마한 연맹체의 하나인 백제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백제의 처음 도읍지는 한강 북쪽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강 이남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백제의 건국과 발전]
백제국은 초기에는 마한 연맹의 장인 목지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점차 힘을 키워 마한 세력을 모두 흡수 통일한 뒤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당시 백제의 수도는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남부 일대였으므로, 강남구 지역도 적지 않은 인구가 밀집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의 남하]
4세기 말에 이르러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즉위한 이후 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아들 장수왕이 즉위하자 수도를 압록강 중류인 국내성[집안]으로부터 대동강 안인 평양으로 옮기고[427], 남진정책을 강화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장수왕 63년(475) 대대적인 고구려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자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게 된다. 이로써 현재의 서울 일대는 고구려의 판도에 편입되었고, 고구려는 이곳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고 이후 77년 동안 지배하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고지의 회복을 엿보던 백제는 신라와 힘을 합쳐 551년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의 땅들을 모두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2년 뒤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이 지역은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신주의 주치(州治)는 경기도 광주에 두었는데, 이로써 서울 지방의 주인공은 백제·고구려에 이어 신라로 바뀌게 되었다. 진흥왕은 이러한 승리를 기념하고자 북한산에 순수하여 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은 백제에 큰 타격이 되었던 반면, 신라로서는 삼국 제패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배경이 되었다. 진흥왕 18년(557) 신라는 신주를 폐하고 지금의 서울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약 11년 뒤인 진흥왕 29년(568)에는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지금의 이천에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으며, 진평왕 26년(604)에는 남천주를 폐지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주치의 이동에도 서울 지역은 계속 신라의 영토였으며, 한때 고구려가 온달장군을 보내 이 지역을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603) 그 후 문무왕 2년(662)에 남천주가 다시 설치되고 문무왕 4년(664)에 북한산주를 한산주로 바꾸었다.
[통일 신라기의 한산주]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개의 주로 재편성하고 경주 이외 4군데에 소경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신라의 9주 5소경제에서 지금의 서울 지방은 한산주에 편입되었다. 그 후 경덕왕 16년(757)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칠 때 한산주는 한주로, 당시 서울 지방은 한양군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한양군의 영현은 황양(荒壤)[풍양:지금 양주군]과 우왕(遇王)[행주:지금의 고양시 행주] 등 2개 현이었다. 이와 같이 경덕왕 16년(757)에 개칭된 한양군은 신라 하대까지 그대로 한주 소관 군현으로 지속되었으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태조 23년 양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