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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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國賓 |
영어음역 | Jo Gukbin |
이칭/별칭 | 경관(景觀),설죽(雪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금석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종대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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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금석리 |
성별 | 남 |
생년 | 1570년 |
몰년 | 1642년 |
본관 | 풍양 |
대표관직 | 형조참의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 자는 경관(景觀), 호는 설죽(雪竹). 아버지는 참봉 조유백(趙惟白)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금석리 바디실에서 출생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활동사항]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바로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08년(선조 41) 승정원가주서로 선조의 임종을 지켰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문관검열에 임용되어, 1610년 황해도도사, 1615년 정언·지평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16년까지 충무위부사과의 직책으로 기사관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부사과를 지냈으며, 1618년에 오위(五衛)의 사과(司果)로 있으면서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였는데, 소명국이 광릉의 나무를 벤 일이 발생하자 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귀양갔다. 인조반정으로 석방되어 돌아와 1631년(인조 9) 첨지중추부사로 정사에 참여하고, 다음해에 형조참의로 있다가 반대파의 박해로 벼슬에서 물러나 음성 금왕읍 바디실에 은거하였다. 1635년(인조 13) 공조참의로 관직에 있다가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금왕읍 바디실에 은거하며 한탄한 시 「향거자탄(鄕居自歎)」 한 수가 전한다.
[묘소]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금석리 바디실에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