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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인력거부 동맹파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276
한자 大邱 人力車夫 同盟罷業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노동쟁의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인력거조합에서 임금 문제로 일으킨 노동쟁의.

[역사적 배경]

일제강점기 대구인력거조합에는 기생만 태우는 경일조(京一組), 남문조(南門組), 대성조(大成組), 서성조(西城組) 등 4개 하부 조합이 있었다. 인력거부 80여 명이 1924년 2월 1일 만경관에서 모여 대구인력거노우회를 결성하고, 인력거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향상·단결하고자 활동하였다. 대구인력거조합은 주로 임금 문제로 동맹파업을 하였다.

[경과]

1. 1920년대 동맹파업

1920년대 대구 인력거 조합원은 경기 불황과 낮은 임금으로 인하여 조합에 납부하는 사납금을 지불하기 어려웠다. 1926년 대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타케우치 류헤이[竹內柳平]의 사판조(寺阪組)에 인력거 차대 비용을 하루 70전에서 50전으로 인하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사판조에서는 60전으로 제시하였으나, 인력거노우회 소속 사판조의 인력거 노동자 24명이 거부하였다. 인력거노우회 소속 노동자들은 1926년 2월 4일부터 일제히 파업을 단행하였다. 결국, 60전으로 합의를 하고 사판조의 인력거 노동자는 복귀하였다.

2. 1930년대 동맹파업

1930년 대구 지역에서는 자동차 증가와 부영 버스 등장으로 인력거 노동자의 수입은 줄어들었다. 생계난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생활이 곤란하였다. 1920년대 80여 명이던 회원 수가 1930년대 50여 명으로 줄어든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인력거 이용 비용은 통상 30전이었다. 그런데 기생 요리집은 인력거 노동자들에게 20전만 주고, 10전을 자신들이 가져 갔다. 1930년대 초중반 대구에서는 인력거 1대당 25전으로 요금을 통일하였는데, 그 돈보다 5전이 낮은 금액을 받았다. 인력거 노동자들은 25전을 요청하였지만, 요리집이 거부하였다. 이에 대구 인력거 조합원은 인력거 한 대당 요리집에 바치는 비용이 과도하게 비싸다는 이유로 동맹파업을 하였다. 마침내 1937년 20일 오전부터 2전은 요리집이 갖고, 23전은 인력거 노동자에게 주기로 합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반인은 25전으로 인력거를 이용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인력거 노동자들의 파업은 노동자의 열악한 조건을 스스로 극복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킨 노동운동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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