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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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汶燖 |
영어공식명칭 | Kim Munsi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교육운동가.
[개설]
김문심(金汶燖)[1912~1987]은 대구에서 교원노조를 결성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대악법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가계]
김문심은 1912년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 앙사동에서 김정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문심은 평안북도 초산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 경신중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평안북도 영변에서 금융조합 이사로 근무하였다. 1939년 무렵 서울 경신중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약 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4년 무렵 귀향하여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평북 초산공립농업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학도대를 조직케 하고, 초산군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때 김문심은 초산 군민대회에서 초산군 치안 유지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뒤 소련군 진주 이후 초산군 임시인민위원장이 되었으나 소련군에 실망하여 평안남도 안주중학교 교무주임이 되었다. 1·4후퇴 때 국군 제7사단 수색대대장 김영란 대위와 동행하여 가족과 함께 남하하였다.
대구에 정착한 김문심은 경북고등학교와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1960년 5월 29일 대구종로초등학교 강당에서 교원노동조합경북도연합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결성대회는 경북 지역 26개 시·군의 35개 초·중등학교를 대표한 교사들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교원노동조합경북도연합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도 단위 교원노동조합이었으며,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 정권의 교원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에 맞서 교원노동조합의 합법화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문심은 1961년 3월 31일 대구 동문동 노동신문사에서 교원노동조합경북도연합회를 대표하여 대구의 혁신계 정당·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공투위]를 결성하였다. 공투위는 1961년 4월 2일 교원노동조합연합회 앞에 집합하여 대구역 광장까지 시위행진을 한 후 대구역 광장에서 공투위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문심의 교원노조는 학생단체들과 함께 선전 및 구호문 작성을 담당하였다.
당국은 4월 2일 공투위의 대구역 광장 사용을 불허하였지만 공투위는 시위와 대회의 효과를 고려하여 대구역 광장 사용 강행을 결정하였다. 1961년 4월 2일 대구역 광장에는 “장 정권 물러가라”, “악질 경찰관 물러가라”, “이대악법은 살인법이다. 죽음으로써 막아 내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김문심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1960년 4월 2일 대구역 광장에서 공투위 주최 이대악법반대궐기대회를 개최한 것을 문제 삼은 군사 정권에 의하여 1961년 8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반국가행위죄가 적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문심은 이후 여러 차례 감형 처분을 받고 1970년 출소하였으나 「사회안전법」에 묶여 사회 활동에 제한이 있었다. 출소 뒤 『불란서 문학사』를 번역하는 등 불문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1987년 2월 6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문심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판교공원묘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