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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의 유로는 역사시대 이래 지금까지 동일했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02
한자 新川- 流路- 歷史時代 - 只今- 同一-
영어공식명칭 The waterway of Sincheon(stream) has been the same since the historical era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권

[정의]

대구광역시의 중심 하천으로 대구광역시 영역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천의 물줄기.

[신천의 위상]

대구분지는 여러 하천이 발달하여 생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고문헌과 관련 자료에 따르면 신천(新川)은 예로부터 대구분지의 다른 하천들에 비하여 대구부(大丘府) 주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신천대구부 주민들에게 친숙하게 여겨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천은 지리적으로 금호강동화천 일대에 비하여 대구부의 중심지인 경상감영으로부터 가까웠다. 1736년(영조 12) 경상감사인 민응수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대구읍성을 축성하였다. 대구읍성의 공간적 분포가 현 대구광역시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의 내부 위치에 해당한다. 대구읍성 내부에 대구부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였던 경상감영이 있었으므로 신천대구부 주민들에게는 매우 밀접한 생활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천이 비교적 넓은 대구분지 한가운데를 흐르는 것에 비하여 동화천의 배후지는 좁은 분지 내지는 곡저평야 형태의 지형적 특성을 보이고 있어 큰 규모의 취락 형성에는 불리하였다. 또한 금호강은 대구 지역 거주자들이 팔공산동화천으로 접근하는 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신천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구 지역민들에게는 수원지로서, 또한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매우 중요한 생태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신천의 지리적 특성]

대구 분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은 대구시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호강의 지류이면서, 금호강과 더불어 대구의 중심 하천이다.

신천의 발원지는 두 곳이다. 하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우미산 남서쪽에 있는 밤티재[570m] 부근이다. 또 다른 하나는 비슬산 북동사면에서 발원하는 총 길이 약 13㎞의 용계천 상류이다.

밤티재에서 발원한 신천은 달성군 용계동 가창교 남쪽에서 신천의 지류인 용계천이 합류하여 북구 침산동 침산교 부근에서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유역면적 약 165㎢, 길이 약 27㎞에 달하는 도시하천이다. 비교적 큰 하상경사 탓에 유속도 빨라서 가창교에서 상동교까지는 초속 4~5m, 상동교로부터 침산교까지는 초속 2~3m를 보인다. 신천 유역의 대략적인 분수계는 동으로는 상원산-동학산-병풍산-용지봉-당고개-두리봉-형제봉, 서로는 유역 내 최고봉인 비슬산-청룡산-달비고개-앞산-대덕산-두류산-침산, 남으로는 비슬산-헐티재-통점령-밤티재-삼성산-상원산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신천의 유역 형상은 동부와 서부 및 남부가 산지로 둘러 싸여 있는 반면에 북쪽이 트여 있는 일종의 말발굽형이다.

신천이 통과하는 곳에 발달한 지형 경관은 소(沼), 여울, 습지, 사력 퇴적지, 하식애, 하식동굴, 판상절리 지형, 기반암 하상, 공룡 발자국 화석 등이 있다.

[신천, 대구천, 이천천]

대구 중심부를 흐르면서 신천의 발원지와는 다른 하천으로 대구천달서천이 존재한다.

대구천앞산삼정골과 인근의 소규모 구릉지에서 발원하여 흐르면서 봉덕시장 부근에서 바로 북류하여 건들바위 근방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대구천 물줄기 중, 한 줄기는 건들바위, 유신학원네거리, 구 중앙도서관, 대구광역시청 옆, 칠성시장을 지나 도청교 하류 약 150m 부근에서 신천으로 유입한다. 다른 한 줄기는 건들바위, 반월당네거리 부근, 계산성당 앞을 지나 대명동·남산동 일대 구릉지에서 흘러내리는 또 다른 하천과 동산(東山) 부근에서 합류하여 오토바이 골목인 인교동을 지나 달성공원 부근에서 달서천과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흘러간다.

1924년에 『조선교통지도』가 발행된 이후 대구는 일본인들이 추진한 대구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하천의 유로 변화가 생기게 된다. 즉, 이천교에서 대백프라자가 위치하는 신천 쪽으로 제방을 쌓아 대구천의 물 흐름을 일부 돌린 이후부터 건들바위대구천의 흐름은 끊어진다. 그래서 대구천으로 흐르던 물은 이천천으로 유로가 변경되어 신천으로 유입되고 그 일대는 습지로 변한다. 이러한 습지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지속되어 미나리 밭으로 이용되었다. 또 습지로 변할 무렵 절벽 아래의 습지 가까이는 논과 밭으로, 약간 높은 평지는 과수원으로 이용되었고, 민가는 병영(兵營) 앞 길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습지가 없어졌다.

[신천 지명에 대한 기존의 인식]

신천 지명과 관련하여 대구 지역민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구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신천이 자주 범람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1778년 대구판관 이서가 주민의 기부금과 이서 자신의 사재를 들여 신천 물줄기를 지금의 유로로 변경시킨 덕분에 새로 낸 물줄기, 즉 신천(新川)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대구판관 이서 덕에 대구 지역민들은 수해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어 그 보답으로 이공제비(李公堤碑)를 조성하였다.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신천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서는 잘못된 부분이 있어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신천 지명 오류에 대한 논증]

1. 지형도와 항공사진에 의한 검토

1918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1:50,000 지형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항공사진, 1964년 육군 측지부대에서 발간한 「1:25,000 지형도」를 토대로 검토한 결과 신천의 원유로가 상동교 부근에서 분류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고산골과 인근에서 유출되는 물은 모두 신천으로 유입된다.

2. 고지도 및 고문헌에 의한 검토

‘신천’이라는 용어가 새로 생겨난 하천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대구판관 이서가 제방을 축조하였던 1778년 이전에 발간된 대구 고지도와 고문헌을 조사하였다.

첫째, 『팔도여지지도(八道輿地之圖)』[16세기 후반], 『광여도(廣輿圖)』[1698~1703년], 『해동지도』-대구부[18세기 전반], 『좌해분도』[18세기 중기], 『동국지도』[18세기 중기] 등에 표현된 신천의 위치는 현재 신천의 위치와 동일하다. 특히, 정밀 고지도인 『해동지도』에서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둘째, 『경상도지리지』[1425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의 ‘대구 편’에는 이미 ‘신천’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셋째, 『조선왕조실록』 ‘성종 편’ 기록에 의하면 1481년(성종 12)에 “대구부사 최호원(崔灝元)이 풍수의 학설을 믿고서 하천의 근원을 막고 백성들의 농경지에다 수로를 만들어 그 수로로 물이 흐르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한탄하므로 이명숭(李命崇)이 어사로서 최호원을 파직시켰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성종 12년 1월 22일]. 이 내용을 토대로 신천의 유로 변경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수해로부터의 안전을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기보다는 풍수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소규모의 유로 변경에 해당한다. 특히 풍수적으로 볼 때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대구읍성 사이를 대구천이 관통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연귀산의 맥을 단절하는 대구천 지류 일부를 백성들의 농경지로 유로 변경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넷째, ‘신천(新川)’ 지명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경남 창원, 경북 성주, 전남 진도, 경기 시흥, 서울 잠실 등이 있다. 창원의 경우는 동쪽의 의미를 가지는 ‘새’가 ‘신(新)’으로 한자화되었고, 서울은 ‘샛강’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대구 신천의 지명 유래를 판관 이서가 물길을 돌려 새로 조성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신천수성현대구현[달구벌]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사이천’, ‘새천[샛강]’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신천(新川)’으로 오기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달구벌 동편에 있는 하천이라 ‘새내’로 부르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신천’으로 바뀌었다는 해석도 고려할 만하다.

3. 이공제비로부터의 검토

신천 원유로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인식은 다음의 자료로 논증할 수 있다.

첫째, 이서가 1778년에 신천의 수해를 막기 위하여 신천에 제방을 쌓은 곳은 지금의 상동교에서 수성교 일대 사이로 판단된다. 수성교 일대는 한국전쟁 이후 서민들의 생계수단으로 방천시장이 조성될 당시 수성교 부근에서 터 파기 공사를 하던 중, 이서의 공덕을 기려 세워둔 기념비가 발견되었다[현재 상동교 동편으로 이전]. 즉, 신천의 물길을 돌린 것이 아니라 신천의 공격사면에 제방을 쌓아 대구를 신천의 범람으로부터 지켰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공사와 관련된 기념비는 그것이 만들어진 곳에 세워 두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사실이다. 즉, 수성교 부근의 신천은 하천 지형 특성상 공격사면에 해당되어 많은 비라도 내려 홍수가 나면, 매우 취약지가 된다. 특히 조선시대 수성교대구읍성(大丘邑城) 바로 남쪽에 위치하는 관계로 이 부분에서 범람이 일어나면 대구읍성 전체가 침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서가 제방을 쌓은 것이다. 상동교 동편에 위치하는 이공제비에 새겨진 글에는 신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은 있어도 신천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다.

둘째, 현재의 첨단기술로도 새로운 물길을 조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새로운 물길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 비용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 2003년 태풍 매미로 훼손된 신천을 일부 복구하는 비용도 약 29억 원 이상이 들었다.

셋째, 안동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호방사적비(湖防事蹟碑)는 1777년(정조 1) 대홍수 때 유실된 제방인 포항제와 송제를 1778년에 새로 쌓은 이력을 담아 1780년에 세운 것이다. 호방사적비 비문에는 제방 재건에 안동읍의 장정으로 부족하여 안동부사가 경상도관찰사에 도움을 요청하여 도내 각처에서 약 18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함으로써 길이 약 2.8㎞, 높이 약 9m 정도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1777년에는 경상도 일대에 대규모의 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신천 수성교 서편 일대에 세워졌던 이공제비 역시 1777년의 대홍수로 인하여 대구부 일대 주민들의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1778년 대구판관이었던 이서가 후원금과 본인 사재를 들여 신천 변에 제방을 쌓았으며, 이를 기리려는 마음에서 대구부 주민들이 이공제비를 세웠던 것이다.

[결론]

신천의 지명 유래와 물길에 관한 논증을 통하여 드러나는 ‘신천’ 지명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천 지명 유래는 기존의 물길을 돌려 새로 생겨난 하천이라는 의미가 아닌 대구현수성현 사이를 흘러가는 ‘사이천’, ‘새천’, ‘샛강’이 한자화 과정에서 ‘신천’으로 오기된 경우이다. 둘째, 대구의 동쪽에 위치하는 관계로 ‘새천’으로 불리던 것이 한자화 과정에서 ‘신천’으로 오기된 경우이다. 여기서 ‘새’는 동쪽에 해당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셋째, 1778년 대구판관 이서가 대구를 수해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신천에 제방을 쌓은 연유로 대구 주민들이 이서의 선정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이공제비를 세웠다. 이공제비 비문에 새겨진 내용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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