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0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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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表節祠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로24길 22-35[동변동 23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능성구씨 사당.
표절사(表節祠)가 있는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은 능성구씨의 집성촌이다. 임진왜란 때 팔공산에서 창의한 구회신(具懷愼)이 종전 후 대구 무태리에 입향·정착하면서 8대조 문절공(文節公) 송은(松隱) 구홍(具鴻)을 제향하기 위하여 1600년(선조 33)에 건립하였다.
고려 말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구홍은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킨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1637년(인조 15)에는 훈련원 첨정(僉正) 구회신(具懷愼)[1564~1634]을 배향하였으며, 1783년(정조 7)에는 구회신의 현손(玄孫)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 구홍리(具洪履)[1692~1779]를 추배(追配)하였다. 「중건 상량문」과 「기문(記文)」은 동계(東溪) 김창년(金昌年)이 지었다. 「중건봉안문」은 다음과 같다.
“이 묘우를 돌아보니 문절공을 모신 사당으로, 삼현(三賢)을 향사하니 일소이목(一昭 二穆)입니다. 춘추로 향화(香火)를 드리며 길이 본보기로 삼아, 사모하여 갱장(羹墻)을 붙인 지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백양(白羊)[1871년]에 이르러 우리의 도가 액운을 만나, 조정의 명으로 묘우가 훼철되니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황량한 빈터에 잡초만이 무성하니, 규맥(葵麥)의 노래처럼[麥秀歌] 마음이 상심하고 옛 자취가 처량하였습니다. 빈터를 가리키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우울한 마음을 펴지 못하고 또 100년이 흘렀습니다. 천리가 순환하여 마침내 밝게 풀 수 있게 되어, 광명이 비치니 의논을 발하여 복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새로 재목을 구입하여 묘우를 중건하니, 묘우가 새롭게 빛나고 단청이 영롱하옵니다. 좋은 날 좋은 때를 점쳐 택하여, 신주를 다시 새롭게 만들어 부조묘(不祧廟)에 모시오니 길이 기뻐하시옵소서. 희생(犧牲)과 술로써 제향을 드리오니 변두(籩豆)가 정연하고, 모든 법도가 갖추어지니 더욱 새롭고 우리의 도가 빛나옵니다. 영원토록 길이 편안하시옵소서. 경건히 술잔을 올리며, 감히 그 연유를 고하오니 강림하시어 밝게 이르소서.”
표절사는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마을 뒤 학봉(鶴峰) 아래에 있다.
표절사는 1600년 건립 후 수차례 중수를 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2007년에 문중에서 중건·복원하였다.
표절사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남향 목조 기와집이다.
표절사는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능성구씨 문중에서 매년 1회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표절사는 고려 ‘두문동 72현’의 절의 정신과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의병장을 제향하는 사당이며, 충효 정신을 교육하는 데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