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5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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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候亭 |
영어공식명칭 | Bukujeong|Buku Pavilion |
이칭/별칭 | 읍북루(揖北樓)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99길 24[시장북로 22-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본욱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10년 무렵 - 북후정 훼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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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북후정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99길 24[시장북로 22-6]![]() |
성격 | 정자 |
양식 | 목조 와가 팔작지붕 2층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대구광역시 중구 시장북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
북후정(北堠亭)은 『대구읍지(大丘邑誌)』에는 읍북루(揖北樓)라고 하고 “부(府)의 서쪽 3리(里)[약 1.19㎞]에 있다”라고 하였다. 『대구부읍지(大丘府邑誌)』에서도 읍북루라 하고 ”부(府)의 서쪽 3리에 있다. 일명 북후정(北堠亭)이다”라고 하였다. 두 읍지의 기록을 따르면 북후정은 초기에 ‘읍북루’로 불리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북후정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북후정에서 개최되고 나서이다. 조선시대의 서문시장은 음력 2일과 7일에 장이 서는 정기 시장이었으며, 3만여㎡에 이르는 대규모 공간에 많을 때는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였다. 1907년 2월 21일 서상돈이 북후정 위에서 「국채보상운동취지서」를 낭독하였고, 2월 24일[음력 1월 12일]에는 서문시장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또다시 북후정 위에서 취지서와 규칙을 낭독하고 국채보상에 대한 ‘통문’과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의 규칙’을 인쇄·배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북후정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북후정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에 있는 서문시장의 동북쪽에 있었던 옛 서문시장에서 큰 장이 열리는 지점에 있었다. 그 위치는 중구 국채보상로99길 24[시장북로 22-6] 일대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북후정의 정확한 건립 연대와 건립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여러 자료를 통하여 적어도 대구읍성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1768년(영조 44)에는 ‘읍북루’로 편액된 것을 알 수 있다. ‘북후정’으로 편액된 것은 1832년 이후로 보인다. 북후정은 1910년 무렵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북후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2층 팔작지붕 목조건물이었다.
북후정은 1910년 무렵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1910년에 찍힌 서문시장 사진에는 북후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후정은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주요한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위치와 건물에 대한 고증을 거쳐 복원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