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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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殷暉 |
이칭/별칭 | 경회(景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에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김은휘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종군하며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지키던 중 정철이 무고를 당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회(景晦). 고조할아버지는 좌의정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 김극유(金克忸)이다. 할아버지 김종윤(金宗胤)은 군수(郡守)이고 아버지 김호(金鎬)는 현감(縣監)으로 찬성(贊成) 벼슬을 추증받았다. 어머니는 전의 이씨이다. 큰아버지인 김석(金錫)이 아들이 없어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김은휘(金殷暉)[1541∼1611]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실패하고, 음보로 관직에 등용되어 안팎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내직은 활인서 별제·사포서 별제·수운 판관(水運判官)·통례원 인의·사헌부 감찰·종부시 주부·호조 좌랑·공조 좌랑·형조 정랑·호조 정랑·종친부 전적·통례원 상례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교하 현감·임피 현령, 청도·중화(中和)·단양·온양·청풍·가평·천안 등 7개 군수와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청도에는 1588년(선조 21)에 부임하였다가 1590년(선조 23) 모친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선조 때 황윤길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와 일본이 침입할 위험이 많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연도와 가까운 주·군에 소속된 성지를 일제히 수축 또는 신축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때 청도의 군수 김은휘가 토성으로 되어 있던 청도읍성을 석조로 축성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이듬해 관병과 의병의 연합군을 이끌고 수원의 독성산성을 지키다가 정철이 무고를 당하자 낙향하였다. 그 후 호패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여립(鄭汝立)을 여러 차례 규탄하였다.
[학문과 저술]
젊어서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묘 앞에 묘갈이 있다.
[상훈과 추모]
만년에 나이 많은 노인에게 주는 수직(壽職)을 받아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