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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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興金氏 |
분야 | 성씨·인물/ 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래업 |
본관 | 서흥 김씨 본관 - 황해도 서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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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서흥 김씨 입향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
세거|집성지 | 서흥 김씨 집성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매전면 남양리 |
성씨 시조 | 김보 |
입향 시조 | 김덕유 |
[정의]
김보(金寶)를 시조로 하고 김덕유(金德裕)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청도군의 세거 성씨.
[연원]
서흥 김씨(瑞興金氏) 시조 김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6대손으로,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이다. 손자인 김천록(金天祿)이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280년(충렬왕 7)에 왕으로부터 서흥군(瑞興君)으로 봉군(封君)된 뒤, 서흥을 본관으로 삼고 할아버지 김보를 시조로 추존하여 세계를 잇게 되었다.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인 김굉필(金宏弼) 이후 문중이 명문(名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김중건(金中乾)을 파조로 하는 경기파(京畿派), 김중곤(金中坤)을 파조로 하는 영남파(嶺南派)·나주파(羅州派)·해남파(海南派), 김중인(金中寅)을 파조로 하는 초계파(草溪派)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 경위]
1700년대 중엽에 김덕유(金德裕)가 창녕군 계팔에서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로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정확한 입향 경위는 알 수가 없다. 신도리는 개울가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비가 많이 오면 피해가 많아서 마을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주민들의 협동심이 매우 높았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 한국 근대화의 기초인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현황]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도군 내에 총 48가구 1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2012년 현재 청도읍 신도리에 10가구 내외, 금천면 남양리에 10가구 내외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관련 유적]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에 서흥 김씨 문중 재실인 아산재(牙山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