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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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本軍用列車顚覆未遂義擧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1년 11월 19일 - 일본 군용 열차 전복 미수 사건 만주 사변으로 파견되는 일본 군용 열차 전복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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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31년 11월 18일 - 일본 군용 열차 전복 미수 사건 일본 군용 열차 전복·파괴를 결의 |
특기사항 시기/일시 | 1931년 11월 22일 - 일본 군용 열차 전복 미수 사건 주모자 박근이, 전팔용, 추진구 대구 지방 법원에서 각각 징역 7년 선고받음 |
발생|시작 장소 | 일본 군용 열차 전복 미수 사건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
성격 | 항일 의거 |
관련 인물/단체 | 박근이|추진구|전팔용 |
[정의]
1931년 경상북도 청도군 고수동 출신의 박근이, 전팔용, 추진구가 계획한 만주 파견 일본 군용 열차 전복 기도 사건.
[개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은 의병 항쟁에서부터 시작해 자정순국(自靖殉國), 3·1 운동, 군자금(軍資金) 모집, 사회주의 운동, 의열(義烈) 투쟁, 광복군 투쟁, 학생 운동까지 광복을 맞는 순간까지 쉼 없이 전개되었다.
경상북도 청도군에서도 만세 운동, 군자금 모집, 국채 보상 운동 등 다양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에는 만주로 군인을 수송하는 열차를 항일 투사 3명이 철로에 큰 바위를 올려놓고 전복시키려다 미수에 그친 항일 의거가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전시 체제(戰時體制)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상북도 청도군 고수동(高樹洞)의 박근이(朴根伊)[21세, 고용인], 추진구(秋振求)[23세, 고용인], 전팔용(全八龍)[21세, 고용인] 3명은 이영희(李永喜) 곡물상에 고용되어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조선의 독립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별 지식도 없던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박근이, 전팔용, 추진구 3명이 곡물상에서 일을 해주고, 쌀을 지고 철둑을 건너는데 등 뒤에서 “조선징, 조센징, 한도징”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깜작 놀라서 쌀을 떨어뜨리고 돌아보니 만주 사변에 파견되는 일본군을 실은 군용 열차 안에서 일본 군인들이 조선인을 놀리려고 부르는 소리였다. 이러한 상황이 늘 반복되었지만 평소에는 참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철도 부근을 지나다가 또다시 열차의 일본군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1931년 10월 경 추진구가 전용팔을 불러 하소연하니 자기도 작년 10월 경 별다른 잘못이 없는데 일본 헌병에게 맞은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일본 놈을 혼내줄 방안을 강구하자고 하였다.
[경과]
1931년 11월 18일 밤 이들은 같은 동네 김원통(金元通)의 음식점에서 12시까지 음식을 먹고 돌아가던 중, 마침 만주 사변으로 파견되는 일제의 군대와 무기 수송 열차가 청도역에 도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평소 일제의 군용 열차가 청도역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함께 군용 열차를 전복·파괴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김광조(金光祚)의 집 부근에서 길이 약 1척[약 30.3㎝], 폭 약 7촌[약 21.21㎝], 높이 약 5촌[약 15.15㎝], 중량 약 4관[약 15㎏]의 돌 하나를 주워 박근이, 전용팔이 운반해 선로 내의 침목(枕木)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건널목 서편의 배인상(裵寅相)의 집 앞에서 열차가 지나가다가 전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1년 11월 19일 오전 0시 22분 청도역에 도착한 일본군 제8 사단 야포병 제8 연대 1개 대대[장교 하사 이하 합계 578명의 전시 무장병]와 보병포, 중기관총, 필마 등 군용 물자를 실은 봉천행(奉天行) 임시 제3 군용 열차는 0시 24분 청도역을 출발해 0시 27분 건널목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선로에 설치한 돌은 열차의 하부에 장치된 제동 장치에 걸려 약 50m 정도 끌려갔을 뿐 열차를 전복시키거나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선로를 경비하던 철도 보선 공부(保線工夫)가 발견하고 역장에게 보고하였고, 경찰의 조사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결과]
박근이, 전팔용, 추진구의 군용 열차 전복 의거는 미수에 그치고, 이들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현장 검증 때는 청도, 밀양, 대구, 경산에서 구경꾼이 도시락을 지참하고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1931년 12월 14일 오전 10시 대구 지방 법원 제4호 법정에서 송하(松下) 재판장 주심으로 공판이 개정되어 사실 심리를 마치고, 송전(松前) 검사가 준엄한 논고 후에 각 징역 10년씩을 구형하였다. 1931년 12월 22일 오전 10시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송하 재판장 주심으로 언도 공판이 개정되어, 형법 제128조 및 제126조 제1항에 의해 박근이, 전팔용, 추진구에게 각각 징역 7년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전체주의·군국주의 폭압 정치 하에서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로 지배와 수탈 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항일 독립 운동의 지속적인 전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도 지역에서 전개된 1931년 11월 18일의 군용 열차 전복 의거는 청도인의 항일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높인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