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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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社洞里城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65전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조선 |
집필자 | 안성현 |
현 소재지 | 마산 사동리 성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65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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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통일신라시대에 연해 항로를 통제하기 위하여 축성된 토성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동면 사동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토성.
[개설]
사동리 성지는 문헌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무명성 유적이다. 사동리 성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경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마산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지표조사가 전부이다. 또 창원시 지역의 고대 성곽을 다루는 논고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졌을 뿐, 그 외에 사동리 성지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의 조사결과 사동리 성지의 축조 시기는 조선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상세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야만 성지의 정확한 축조시기와 목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사동리 성지 내부에는 사동 마을이 들어서 있고 성벽 주변으로는 경작이 이루어지면서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위치]
사동리 성지가 위치한 곳은 진해현성에서 북서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해당된다. 이곳 남쪽으로는 진동천과 인곡천, 그리고 덕곡천이 합류하여 진동만으로 흘러가고 있어 강을 통해 진동만으로 진출하거나 반대로 진동만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 사동리 토성으로 진입하기 유리하다.
[변천]
사동리 토성은 문헌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무명성일뿐 아니라 고고학적 시·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나 목적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동리 토성의 축조시기와 성격을 각각의 보고서나 논문에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우선 축조 시기에 관해서는 『마산시 문화 유적 분포 지도』와 『한국 고고학 전문 사전-성곽·봉수편』에서는 사동리 토성이 조선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통합창원시에 남아있는 고대 성곽의 성격과 특징을 다룬 논고에서는 사동리 성지가 통일 신라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그 근거로서 사동리 성지의 입지조건을 언급하였다. 사동리 성지의 위치는 진동만으로 유입되는 3개의 소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북서쪽으로 남해안을 따라 연결된 연안해로의 중심지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토성들은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까지 집중적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사동리 토성 역시 통일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서남벽 주변에서 출토된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편들은 사천 선진리 토성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사동리 토성의 축조시기를 통일 신라 시대로 판단하는 또 다른 근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사동리 토성은 통일 신라 시대에 초축되어 고려 및 조선 시대까지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형태]
사동리 토성은 포곡식 성으로, 성지의 평면 형태는 부정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다.
[현황]
사동리 토성은 진동면 사동리 사동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사동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남동쪽에는 성벽이 확인되지 않지만 처음 성을 세울 당시에는 성벽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토성의 내부와 남서쪽 벽은 사동 마을이 들어서고 경작이 이루어지면서 훼손된 상태이다.
남서벽에는 작은 길을 개설하면서 절개된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성벽의 축조 수법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은 암반덩어리가 다량 혼입된 사질점토와 점질토를 교대로 다져가며 쌓은 것으로 보이며, 성벽 내외부에 할석이 확인되고 있어 기단석축형 토성임을 알 수 있다.
유물은 서남벽 주변에서 삿무늬 토기편들과 통일 신라 시대 및 고려 시대의 기와들이 다량 확인되었다. 이 중 삿무늬 토기편들은 사동리 유물산포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토성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편들은 사천 선진리 토성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사동리 토성의 축조 시기는 선진리 토성과 동일한 9세기 전반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의와 평가]
사동리 토성과 유사한 형태의 토성들, 즉 바닷가나 강안에 인접한 곳의 토성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었다. 이 토성들은 치소(治所)를 두르거나 치소와 인접한 곳에 축조된 치소성(治所城)과, 치소와 떨어져 해안이나 하천을 조망하기 유리한 지점에 축조된 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토성들은 왜구 및 해적들은 방어하고, 해로를 통제함으로써 세수(稅收)를 안정적인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것이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에는 연안 항해를 하거나 근해 항해를 하였으므로 해로와 인접한 곳의 축성은 해로를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의 표출로 여겨진다. 하천 근방에 축성된 성곽 역시 하천을 이용한 수로 교통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 신라 시대 이후 해안이나 하천 근방에 축조된 성곽들이 어떠한 형태로 이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려 국초에 시행되는 조운제(漕運制)의 12조창 중 통양창이 사천 선진리 토성에 설치되고, 해룡창이 순천 홍내동 토성에 설치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토성이 없었던 마산 지역에는 석두창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에도 고려 초에 회원현성이 축조되었다. 이는 고려 시대에는 조운을 위해 통일 신라 시대 바닷가에 축조된 토성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토성이 없는 지역에는 새로운 토성을 축조하여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동리 성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지방지배와 왜구 방비에 대해 보다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