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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시장을 주름잡은 여장부들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A030206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지

깡시장에서 받은 야채를 서울 중앙시장 다리에서 팔다가 순경에게 붙들려서 많이도 잡혀갔지.”

경제 능력이 없었던 남편 대신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든 박금희 할머니(77세). 현재 부천역전 앞에서 거주하신 지 50년이 넘었다.

자유시장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라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 새마을 지도자로 임명을 받아서 자유시장 살림을 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은 여전히 고단한 일이었다.

부천역 앞에서 사과 궤짝 내 놓고 고구마를 쪄서 팔았어요. 남편은 똑똑한 양반이었지만 생활 능력이 없어 식구를 벌어 먹일 줄을 몰라. 그래, 그 궤짝을 내 놓고 고구마를 찌고 그리고 좀 더 팔려고 연탄불 피워가지고 콩나물국을 끓여서 팔구 그랬어요. 그 때 고구마가 3개에 20원이었거든. 그래, 사람들이 20원어치 사면 국 한 사발 퍼주고는 하루에 한 가마니씩 쪄서 팔았어. 그래도 많이 주고 해서 남는 건 별로 없었어. 그래도 이게 장사다 하고 했지.”(박금희, 부천 자유시장 상인, 77세)

하지만 고구마 장사로는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잘 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채장사, 연탄장사, 국수장사 순으로 종목을 바꾸어 나갔다. 다행히 일제 때 학교를 다녀서 글과 셈에 밝았던 할머니는 깡시장에서 주판을 놓는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셈을 알지 못하는 상인과 손님들이 많아서 계산을 잘못 치르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재산이 조금 모이자 연탄장사와 야채 노점을 시작했다.

“용산 협심연탄에서 차로 하나씩 실고 오면 연탄 열 장씩 들고 배달을 했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네 시에 일어나서 깡시장에서 채소를 받아가지고 애기를 업고 소사역으로 나오는 거야. 여기 근처 밭에서 채소를 넘겨받아서 용산에 팔고 오면 좀 값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힘들게 내려와서는 풋복숭아 받으러 또 다시 깡에 가는 거예요. 또 그거를 싣고 또 중앙시장에 팔러 갔거든요. 근데 노점이니까 팔다가는 순경에게 붙들리기 일쑤였어요. 그럼 애를 데리고 파출소까지 따라가서 손이 발이 될 때까지 빌어서는 저녁 열 시나 되어서야 집에 왔거든요. 그러다 차차차 이것도 못하겠다, 그래서 리어카 사다가 국수를 말아 팔았어. 나는 정말 안 해 본 장사가 없었어요. 또 예전엔 서울역에 가락시장 같은 큰 시장이 있었거든. 거기서 야채장사들이 버리고 간 배추껍데기를 줍는 거야. 그걸 주워서 삶아가지고 우거지로 내다 파는 거지. 그렇게 해서 밑천을 만들었어. 나중에는 사과도 팔아보고 복숭아도 팔아보고 정말 안 해본 장사가 없어.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보내고... 정말 뼈가 부서져도 모르게 열심히 살았네.”(박금희, 부천 자유시장 상인, 77세)

마치 어제일인 듯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40년이 다 되어 가는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복받치시는 모양이다.

“파출소에 많이도 잡혀갔구먼. 어린 막내업고 사과랑 복숭아 받아다 길에서 팔다가 파출소에 잡혀갔는데 밤이 되니 경찰서로 넘기더라고. 서까지 넘어간 건 그때가 처음이지. 애들 셋을 집에다 두고 왔다고 해도 누구 하나 들어주는 사람도 없지, 등에 업힌 막내는 울지. 엄마 잡혀간 줄도 모르고 집에서 배를 곯고 있을 애들을 생각하니 정말 눈물만 나더라고.”(박금희, 부천 자유시장 상인, 77세)

다행히도 할머니는 일찍 훈방되어 아이들에게 돌아왔고 또다시 아이들을 위해 악착같이 장사를 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40년, 검고 윤기 흐르던 머리 위엔 흰서리가 내려앉고, 고왔던 피부에는 세월만큼의 주름이 들어앉았지만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지나온 당신의 생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여장부답게 호탕하게 말씀을 이어가던 할머니의 목소리도 회한이 드는지 조금씩 떨려왔다. 그 고단한 기억은 할머니를 지탱해 온 힘의 원천이었다. 현실의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 때마다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애들이 배고프다하면 성당에서 꿀꿀이죽 타다가 먹이고 애들이 또 쌀밥 먹고 싶어 죽겠다 하면 벼 이삭 주어다가 말려가지고 절구방아로 찧어 애들만 밥해주고 나는 거기다가 무 우거지 같은 죽을 쑤어다가 연명했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나 하나밖에 없는데 어쩌겠어요. 그랬는데 그러면서도 동네일을 착실히 하니까 반장도 시켜줘서 몇십 년 해 먹었지. 박정희 대통령 당선 되가지고 1979년도에는 우리 두 내외가 다 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갔었어요. 그래, 새마을 지도자로 임명을 받아서 새마을 사업을 했지.”(박금희, 부천 자유시장 상인, 77세)

새마을 지도자로 임명받고서도 두 내외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역전에 설치된 공중화장실의 청소를 평생 동안 무료봉사한 것이다. 하지만 새 부천 역사를 지으면서 공중화장실은 부서지고 그 앞에 터를 닦았던 집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나마 정부에서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새로 지은 집이 무허가로 판명되면서 퇴거 요구를 받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모두 담겨 있는 집에서 눈을 감았으면 하는 소망을 놓고 싶지 않다. 한평생 붙들려만 다닌 할머니의 여생이 이제 좀 편안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정보제공]

  • •  박금희(부천 자유시장 상인, 7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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